산재라는 위험의 재분배

2020.10.26 03:00 입력 2020.10.26 16:50 수정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질의가 회자됐다. 류 의원은 2018년 김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올해 9월11일 화물차 운전기사 사망사고가 또다시 발생한 것을 통해 발전소와 배전 노동자들의 현장 안전문제를 물었다. 김용균씨와 같은 작업복을 입고 안전에 대한 감수성 부재를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기업 책임을 강화하고 보호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입법이 진행 중이다. 정의당은 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중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산업재해를 일으킨 사업주와 기업의 처벌을 강화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6월 발의했고, 입법 촉구를 위해 한 달 넘게 1인 시위를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 예방 책임주체를 사업주 외 프랜차이즈 가맹본부 등으로 확대하고 보호대상도 특수고용노동자들을 포함했다.

중대재해가 나고도 ‘무재해 ○○○○시간’ 카운터가 올라가던 현장 풍경이 떠오른다. 하청회사에서 산재가 벌어졌을 뿐 원청의 산재가 아니고, 무재해 시간이 올라가야 원청이 고객에게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도급을 금지해야 하는 작업을 정의하고, 몇몇 작업은 고용노동부의 승인 없는 재하청을 막았다. 원청이 안전조치를 관리감독하고, 예방조치를 수행하고, 하청 회사에 안전 사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산재를 만드는 원·하청 구조 뒤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운영 방식이 깔려 있다. 발전플랜트나 제조업 현장으로 가보자. 제조 핵심 공정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맡는데, 작업이 분업화돼 있어서 바로 옆 생산직 노동자가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또 고되고 힘든 공정은 사내 하청 회사가 맡는다. 근골격계 질환이 많이 발생하는 작업은 하청 준다는 것을 아예 노사 간 단체협상에 못 박은 회사도 있다. 중견 규모 이상 제조기업들은 설비투자를 통해 기계를 이용한 빠른 대량 생산으로 이윤을 창출한다. 반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공정은 인건비가 싼 하청생산으로 전환한다. 청소나 장비 유지보수 등의 일도 사내 하청이나 계약직에게 맡긴다.

산재 기저에 있는 사회적 관계
권익 주장 힘든 하청노동자들
원청 사장 혼낸다고 바뀔까
위험이 교섭 대상 될 수 있어야

지하철 구의역 사고도 옛 서울메트로 소속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스크린도어 정비를 맡지 않고 외주를 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기도 하다. 같은 작업을 정규직이 맡았던 서울도시철도공사의 경우 큰 사고는 없었다. 핵심 업무가 아니라서, 힘이 들어서 등의 이유로 위험한 일은 모두 외부로, 좀 더 약한 고리로 떠넘겨지기 일쑤다. 일에 대한 숙련이 있어야 사고도 피할 수 있다.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조직화되어 있지 않아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외부 부품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낙후되고 열악한 설비 때문에 위험에 노출된다. 축적된 자본도, 충분한 이윤도 확보하지 못한 영세 중소기업에 설비투자는 언감생심이다. 중소기업이 이윤을 만들려면 결국 사람을 ‘갈아 넣어야’ 한다. 중소기업 산재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건 혁신에 대한 공공투자일지도 모른다.

원청 정규직 조합원만 산재 빈도가 높은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위험은 교섭의 대상이 된다. 노동자가 작업하다 위험을 느끼면 안전담당자를 부르거나, 노동조합에 전화해서 작업중지를 요청한다. 위험 요소가 없어질 때까지 조사를 진행하고 조치를 취한다. 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으니 발언을 꺼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기존 업무에 익숙해진 정규직 노동자들은 부서 이전과 직무 변경을 꺼리고, 신규 정규직 충원은 사측이 꺼릴 것이다.

결국 중대재해기업처벌법보다 하청 노동자들의 교섭권과 위험의 재분배가 중요하다. 원청 사장을 혼내준다고 현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위험의 외주화는 축적된 일을 하는 방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청 노동자들이 ‘갑’에 대해 주눅들고, 자신들의 권익을 보조할 누군가를 작업장 내에서 찾지 못하는 것이 산재 기저에 있는 사회적 관계다. 하청 노동자들이 위험을 느낄 때마다 사측과 일상적으로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않은 비정규직 일반노조가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 산재를 줄이기 위한 입법을 한다면 지역의 사회적 협의체가 하청 노동자들이 위험 상황을 인지해 연락했을 때 작업중지를 요청하고 상황 개선을 위해 회사와 교섭할 수 있게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 대안적인 안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대기업·공기업의 정규직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산재라는 위험의 재분배를 책임감 있게 맡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될 것이다. 비정규직들에게 있어 정규직은 임금과 복리후생, 고용보장을 넘어 안전할 권리까지 가진 기득권 세력이다. 위험의 외주화와 산재가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안전 감수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위험의 재분배를 진행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와 지방정부가 이끄는 노·사·민·정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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