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가 ‘잠금해제법’ 예로 든 영국 판례를 찾아봤다

2020.11.15 16:25 입력 2020.11.15 17:54 수정

추미애 법무부 장관(왼쪽)과 한동훈 검사장.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추미애 법무부 장관(왼쪽)과 한동훈 검사장.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검·언 유착’ 의혹을 받는 한동훈 검사장이 검찰에 압수당한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다며 해외 입법례를 참조해 피의자에게 비밀번호 제출을 강제하는 법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헌법 제12조 제2항은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자기부죄거부(自己負罪拒否)의 권리’를 명시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참여연대 등 진보단체들은 추 장관의 법안이 반헌법적이며 검찰개혁에 역행한다고 비판했다.

추 장관이 말한 해외 입법례는 영국의 수사권한규제법(RIPA)이다. 영국은 2000년 7월 이 법을 제정해 수사기관이 국가의 안보, 범죄 예방과 탐지, 경제적 복지를 이유로 피의자에게 비밀번호를 제출하라는 통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제출하지 않을 경우 일반 사건은 2년 이하의 징역, 국가안보 사건이나 아동성착취물 사건은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영국 판례 “비밀번호는 독립적 존재”

15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잉글랜드·웨일스 항소 법원의 2008년 10월 ‘R 대 S와 A(R v. S & A)’ 사건은 영국에서 테러 사건 피의자가 비밀번호를 제출하지 않아 처벌된 첫 판례다. 테러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 2명이 컴퓨터의 일부 파일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수사권한규제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들은 검찰의 기소가 자기부죄거부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비밀번호가 사람의 ‘의지(will)’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봤다. 비밀번호를 ‘열쇠’, 컴퓨터 파일을 ‘서랍’으로 비유했다. 재판부는 “피의자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증거는 일반적으로 자기부죄거부의 권리와 무관하다는 것이 국내법에 확립돼 있다”며 “비밀번호를 일단 만들면 바꾸기 전까지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실제 답변 자체는 피의자를 유죄로 만들지 않는다. 열쇠는 잠긴 서랍을 열어 내용을 드러낼 뿐이다”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영국의 보통법과 유럽인권협약을 언급하며 “특정 상황에서는 (자기부죄거부의) 권리를 제한, 수정, 폐지하는 수많은 법적 예외의 적용을 받는다. 특권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때로는 질문에 답하거나 그들을 유죄로 보이게 하는 정보나 문서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고 판시했다.

영국 차량·흉기 테러가 일어난 2017년 6월 경찰이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는 런던브리지 부근에서 한 여성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런던 |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차량·흉기 테러가 일어난 2017년 6월 경찰이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는 런던브리지 부근에서 한 여성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런던 |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판례 “비밀번호는 진술이며 정신의 내용”

영국 판례의 핵심은 사람의 의지가 작용하는 ‘진술’과 달리 휴대전화나 컴퓨터 등의 비밀번호는 독립적으로 존재해 자기부죄거부의 권리 대상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영국은 한국처럼 성문화된 헌법이 없고 축적된 판례를 통한 보통법을 따른다. 자기부죄거부의 권리는 영국 보통법에서 나왔지만 이를 발전시켜 헌법에 명시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은 한국처럼 수정헌법 제5조에서 “어떤 형사 사건에서도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을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고 자기부죄거부의 권리를 명시했다. 미국은 암호 강제 제출 제도는 없지만 판사가 명령하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법정모욕죄를 선고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비밀번호가 사람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정신 작용이 만든 ‘진술’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2018년 8월 ‘서 대 인디애나주(Seo v. Indiana State)’ 사건에서 인디애나 항소 법원은 스토킹·협박·절도 등 혐의로 기소된 한국계 미국인 서모씨에게 아이폰 비밀번호를 제출하라고 한 1심 법원의 명령은 수정헌법상 자기부죄거부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파일은 암호를 입력하고 해독하기 전까지 유의미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며 “잠금 해제는 국가가 찾는 디지털 정보를 재생성(recreate)하기 때문에 단순한 문서 제출보다 더욱 진술(testimonial)이라고 봐야 한다. 서씨에게 암호를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정신의 내용을 공개하라고 강제하는 것이다. 주당국은 단순한 비밀번호가 아니라 아이폰 전체 내용을 강요했다”고 판시했다.

■법조계 “제도 도입하더라도 엄격 제한해야”

영국의 수사권한규제법은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 안보에 더 무게를 두고 인권을 제한한 것이다. 여러 테러 사건이 일어난 영국 사회의 특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암호 잠금 해제를 강제하는 ‘복호화 명령’ 제도는 영국, 프랑스, 호주, 싱가포르, 남아공, 인도, 말레이시아 등 소수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다. 추 장관은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떤 검사장 출신 피의자(한동훈 검사장)가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아 수사가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다”며 “포렌식에 피의자가 협력하지 않는다면 과학수사로의 전환도 어렵다고 본다”고 적었다. 한 검사장은 “힘없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자기편 권력비리 수사에 대한 보복을 위해 마음대로 버리는 것에 국민이 동의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을 지낸 양홍석 변호사는 “복호화 명령은 도입하더라도 범죄 분야와 요건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며 “제도를 논의할 수는 있지만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이어야 하는데 추 장관의 한 검사장 얘기는 엉뚱하다. 이 제도가 시행되더라도 한 검사장의 강요미수 혐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영국에서도 테러와 아동성착취 범죄 말고는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은 국가의 수사기관과 맞서는 개인의 방어권을 보장한다. 한국에서 피의자는 진술거부권(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인멸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진술거부권을 기본적 권리로 보장하는 것은 형사피의자나 피고인의 인권을 형사소송의 목적인 실체적 진실발견이나 구체적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국가적 이익보다 우선적으로 보호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가치를 보장하고 나아가 비인간적인 자백의 강요와 고문을 근절하려는 데 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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