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한국사회에서 공론 만들기와 풀기

2021.03.08 03:00 입력 2021.03.08 10:20 수정

최근 사회학자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를 읽었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이사 가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미국인들은 가족 몇이서 천천히 며칠 동안 이사를 가지만, 유학생들은 협업을 통해 이사를 일거에 진행한다. 이사하는 학생이 미리 이삿짐을 포장해 놓으면, 이사 당일에 유학생들이 몰려와 짐을 컨베이어 벨트처럼 옮겨가며 순식간에 차량에 싣는다. 이사 가는 학생은 간단한 배달음식 등으로 동료들을 대접한다. 다음번에 누군가 이사 갈 때 일손을 보태야 하는 것도 일종의 ‘국룰’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 유학생들의 ‘이사 풍습’을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본다고 한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전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말이 회자된 지 한 세대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세계가 변화하는 흐름을 지체되지 않고 함께 체험하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1년간 잠시 흐름이 멈춰 있지만 인간의 전 지구적 이동이 확실히 늘었다. 온라인을 통한 연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서학 개미’들은 미국 증시가 개장되는 밤 11시30분부터 호가창을 들여다보느라 잠을 설쳤다는 말을 한다. 국내 연구자들은 온라인으로 열리는 비대면 회의를 통해 해외 학회들에 손쉽게 접속하고 있다.

동시대적인 글로벌 경험은 해외를 거닐든 거닐지 않든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같은 시점, 한국인들은 글로벌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글로벌 시민으로 거듭나야만 하는가? 어떤 정체성과 문화가 글로벌한 것일까?

품앗이와 식사 대접을 교환하고
청년·기성세대가 갈등하다가도
한 목표 앞에선 협력하는 한국인
그 합리성이 ‘지구적 문제’ 해법

청년 세대가 다양한 사회 부문에 진입하자 기성세대는 당황하며 ‘1990년대생이 온다’면서 ‘저들은 선진국 시민’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미국의 명민한 청년들은 일반 기업에 가서 이직을 거듭하며 몸값을 올리거나, 창업을 한다. 한국의 청년들은 시험을 치러 가는 공공부문을 가장 좋은 일자리로 생각한다. 안정적이며 연공서열제가 관철되기 때문이다. 공무원을 비롯한 공채 선호는 30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강하다. 시험을 통한 출세와 좋은 경력의 시작은 동아시아 관료제의 특수성에서 빚어지는 부분이 크다. 흥미로운 것은 갈등하던 두 세대가 함께 일을 할 때는 협업 지향, 최적화 지향의 피드백 사회에 사는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한국의 후진성이나 낙후성으로 환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컨대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렇다. ‘조선’이라는 말 속에 전근대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년실업, 노동의 유연성과 비정규직화, 자산격차 심화, 대도시 집중 등은 선진국이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다만 불평등과 격차의 증대와 맞물리는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대한 강박은 선진국 모두가 공유하는 감각이지만, 한국의 극심한 능력주의와 공정성 언급은 시험을 통해 문턱을 통과할 때까지만 작동하는 지대추구의 정당성일 때가 많다.

한국에서 전 지구적인 보편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긍정성을 포착하고 이를 활용해야만 한다. 문제점과 긍정성은 대개 끈적끈적하게 밀착해 있다. 포장이사 서비스를 시켜도 품앗이를 하던 시절처럼 인부들의 밥(밥값)을 챙겨 줘야 하고, 권고사직을 하더라도 미국식으로 당장 짐을 싸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말미를 줘야 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낙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합리적 특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한계를 도출하며 ‘종언’과 ‘한계’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그 끈적끈적함을 질척댄다고 싫어한다. ‘사과나무’를 심을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 같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서로 적대적인 종족으로 나뉘어, 소통하기보다 ‘박제’하고 ‘추방’하고 ‘차단’하고 ‘단죄’하는 하위문화가 오프라인으로 확산되는 것에 대한 우려로 시작해, 몇년간 어떻게 서로 협상하고 합의할 수 있는 공론을 만들 수 있나 하는 고민을 한참 했다. 갈등 상황을 겪으며 합의점을 조율하기보다 매끈한 파국의 사자후가 많았다. 많은 문제들이 나열되었지만 사회적 합의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정책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문제는 줄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수도권 집중은 강화됐고, 출산율은 인류 역사상 최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역 청년들의 삶은 점점 더 팍팍하다. 친환경적이고 최적화된 에너지 활용과 전력 공급을 보장하는 고립된 그리드를 만들어 예찬받았던 미국 텍사스주는 폭설 앞에서 전기 없는 세상을 한동안 보내야 했다. 전력시스템이 다른 주들과 고립된 데다 민영화되어 공적 개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구체적인 사실과 맥락이 등장한 가운데, 연결되고 지지고 볶고 간섭하고 협상하고 합의하며 풀릴 성격의 것들이다. 사실 한국의 많은 사람은 잘하고 있는 일들이다. ‘추월의 시대’에 걸맞은 공론화와 그에 걸맞은 좋은 결정들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누적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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