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바이올린 위작 여부를 가린 것은 나이테,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021.05.28 11:18 입력 2021.05.28 20:19 수정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발레리 트루에 지음·조은영 옮김|부키|340쪽|1만8000원

세계 최고 바이올린 위작 여부를 가린 것은 나이테,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가 남긴 전설적인 바이올린 메시아가 위작일 수 있다.”

199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악기 보존 전문가인 스튜어트 폴렌스는 메시아의 위작 가능성을 제기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메시아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애슈몰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다. 최소 2000만달러 이상의 감정가를 가진 이 바이올린은 런던의 유명한 악기 제작자이자 수집가 집안인 W E 힐 앤드 선스가 기증한 것이었다. 힐 가문은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제시한 백지수표를 거절하고 미래의 악기 제작자들이 창조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박물관에 메시아를 기증했다. 위작 여부는 한 가문의 명예가 달린 문제였다. 이미 260여년 전 죽은 스트라디바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박물관에 있는 메시아는 진품이었다. 위작 여부를 가려준 것은 악기 전문가도, 문화재 수집가도 아닌 ‘나이테 연구가’였다. 힐 가문과 폴렌스 가문은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과거 기후변화와 자연환경을 밝혀내는 연륜연대학자들에게 진품 감정을 의뢰했다. 힐 가문이 의뢰를 맡겼던 연륜연대학자들은 메시아에 남아 있는 나이테를 분석해 1680년대 만들어진 나이테가 남아 있다고 추정했다. 메시아의 제작 연도로 기록된 1716년보다 앞선 시기의 나무였다. 2016년 피터 랫클리프라는 연륜연대학자도 스트라디바리의 또 다른 바이올린인 ‘엑스-빌헬미’와 메시아가 같은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분석했다. 메시아의 위작 논란은 완벽히 종결됐다.

나이테에는 나무의 나이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살아 있는 나무든, 이미 죽은 나무든 복잡해 보이는 세상사를 해석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연륜연대학자들에게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인 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연구 활동의 극히 일부다. 연륜연대학자들은 나무를 통해 “과거의 평균적인 기후뿐 아니라 극한 날씨, 폭염, 허리케인, 산불과 같은 특별한 사건까지” 알아낸다. 또한 “과거의 기후변화가 유럽의 로마 제국, 아시아의 몽골 제국, 미국 남서부의 고대 푸에블로 사람들 등 세계적으로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탐구한다.

세계 최고 바이올린 위작 여부를 가린 것은 나이테,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나무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며 지난 인류사의 지도를 그리는 연륜연대학자들의 이야기다. 저자는 미국 애리조나대학교 나이테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인 발레리 트루에다. 나이테 연구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지구 날씨가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이것이 인류 문명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고자 연구하는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나이테는 나무가 봄에 더 왕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생긴다. 봄철에서 여름철까지 형성되는 ‘춘재’ 부분은 보통 세포벽이 얇고 크기가 크다.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형성되는 ‘추재’ 부분은 세포가 더 작고 벽이 두껍다. 추재 세포와 춘재 세포 사이에는 한 해와 다음해의 생장을 분리하는 뚜렷한 경계선이 생기는데 그것이 나이테다. 연륜연대학자들은 나무의 단면을 베지 않고도 안전하게 나이테를 센다. 얇은 파이프처럼 생긴 천공기를 사용해 나무의 안쪽에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손상을 최소화하며 목편을 추출한다. 연구자들은 수백㎞를 달리고 오지를 헤매며 샘플을 수집한다.

실험실에 돌아온 연구자들은 나이테 샘플을 사포질하고 고정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나무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기본적으로 나무는 인간이 살기 좋은 날씨에서 잘 자란다. “나무는 식량과 물이 풍부할 때, 남과 경쟁하거나 공격받지 않을 때 행복하다. 행복한 해에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넓은 나이테를 만든다. 반면 가뭄이나 한파를 겪었거나 허리케인이 잎과 가지를 죄다 꺾어 놓는 바람에 행복하지 않은 해에는 생장에 투자할 에너지가 많지 않아 좁은 나이테를 만든다. 따라서 나무의 행복은 날씨에 크게 좌우된다.”

나무가 사는 지역에 따라서도 나이테의 모습은 달라진다. 고산지대나 극지방에서는 건조한 해보다 추운 해에 좁은 나이테를 만든다. 나이테 중에서 독특한 패턴을 가진 구간은 ‘나이테 서명(Tree Ring Signature)’이라고 불린다. 저자가 미국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나무들을 연구할 때, 대부분의 나무에서 1796년 시기의 나이테가 아주 좁게 나타나는 나이테 서명이 있었다. 1796년에는 가뭄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산업 활동으로 인한 온난화와 기후위기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에게 나무는 ‘산증인’이 돼 반박한다. 스위스 취리히 외곽에 있는 산림·눈·지형연구소의 연륜기후학팀은 나이테를 이용해 지난 수세기의 기후를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1998년 기후학자와 연륜연대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은 나이테의 너비나 밀도를 측정해 절대연대를 추정하고, 관측소의 기상 데이터와 한 해 한 해 비교하면서 ‘기후 방정식’을 만들었다. 이 같은 방법으로 기상 관측이 시작되기 전 여름의 기온을 기원후 1000년경까지 재구성했다. 20세기에 일어난 지구온난화는 지난 600년간 전례 없는 현상이었다. 지난 1000년 동안 북반구에서 일어난 연평균 기온 변화를 그래프로 그려보니, 하키 스틱을 눕혀놓았을 때 스틱의 헤드 부분이 톡 튀어오르듯 20세기 들어 급격하게 기온이 오르는 모양이 나왔다. ‘하키 스틱’ 논문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2001년 보고서에서 지구온난화의 증거로서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이 때문에 연구팀은 기후변화 반대론자들에게 20년 넘게 공격받았다.

연륜연대학자들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 표본을 추출한뒤 현미경으로 나이테 정보를 분석한다. 애리조나대학교 나이테 연구소·부키 제공

연륜연대학자들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 표본을 추출한뒤 현미경으로 나이테 정보를 분석한다. 애리조나대학교 나이테 연구소·부키 제공

지진, 허리케인, 산불 등 자연재해의 흔적은 모두 나무에 새겨진다. 저자는 이 흔적들을 이용해 왜 미국 서부에서 최근 몇 년간 파괴적인 규모의 산불이 발생해왔는지를 설명한다. 연륜연대학자들이 이 지역 나무에 새겨진 산불의 ‘흉터’를 살펴보니, 보통 19세기 후반에 마지막 흉터를 가지고 있었다. 1905년 미국 산림청이 신설되고 산림 관리가 강화되면서 작은 산불이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됐다. 저자는 “잦은 지표화(작은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것)는 숲을 건강하고 활력 넘치게 유지하고, 덤불이 산불의 연료가 되지 않도록 조절하는 데 필요했다”고 말한다. 따뜻해진 기온으로 가뭄이 증가한 데다 산불의 연료가 누적된 탓에 한 번 산불이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던 것이다.

나무는 과거의 기후와 제국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하나의 키가 되기도 한다. 기원전 300년~기원후 200년간 온화한 기후를 배경으로 로마의 농업경제가 번창하고, 인구가 늘어나며 제국이 확장된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 “추운 여름이 동반되면서 기원후 550년경에는 여름 기온이 바닥”을 찍는다.

저자는 “유럽이 심각한 기후 불안정을 겪고 있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에 기후가 로마 제국의 해체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은 “가장 비가 넉넉히 내린 수십년 동안 제국을 건설하고 확장”했는데, “정복 활동의 전성기였던 1211~1225년은 15개의 넓은 나이테가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무 이야기를 통해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의 삶이다. 현 인류의 삶도 매분 매초 나무에 새겨져 역사가 되고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를 태움으로써 자연적인 탄소 순환의 한 단계를 드라마틱하게 가속시키고 균형을 깨뜨렸다. … 지구 기온이 상승하고, 빙하의 만년설이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폭염, 가뭄, 홍수, 극소용돌이가 빈번해지고, 산불철이 길어졌다. … 이 시기의 인간은 지구 시스템에 일어나는 가장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지질 기록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겼다.”

나무는 미래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나이테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기후변화에 과거 사회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뿐 아니라 나이테는 속삭임과 고함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결과를 완화하거나 거기에 적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발견하도록 격려한다.” 지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나무에 어떤 미래를 새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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