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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마인>에서 한지용(이현욱)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정서현(김서형)에게, ‘사실은 형수가 성소수자라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은근히 협박한다. “우리, 비슷한 중량의 비밀을 공유했잖아요.” 한지용은 자신의 아이를 낳아준 친모가 죽었다고 속인 후 아내인 서희수(이보영) 몰래 가정교사로 위장해서 집에 들인 파렴치한이다. 그런데 자신의 행동과 정서현의 성적 지향을 ‘비슷한 중량’의 비밀이라고 저울에 올려 버린 셈이다. 한지용은 아버지가 첫째 며느리인 정서현도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약점을 이용하려 한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한지용 네 이놈!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그딴 협박은 못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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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4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 청원이 시작되었다. 국민동의 청원 발의자는 지난해 11월 동아제약 신입사원 채용 면접 과정에서 성차별 질문으로 피해를 당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여 사과를 받아낸 당사자이다. 법률대리인인 김두나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는 “면접에서 성별을 이유로 힘없이 바스러지는 경험을 했고, 언제든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청원 이유를 설명했다.

2007년부터 여러 차례 발의되었으나 번번이 실패로 끝난 차별금지법은 2020년 6월에도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오늘은 차별금지법이 무엇인지, 어떤 순간에 차별금지법이 필요한지 살펴본다. 덧붙여, 이 글은 오랫동안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주장해온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의 여러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미리 밝힌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 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學歷),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차별이 될 수 있는 이유나 근거 또는 특성이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사유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총 네 가지 영역에 적용된다. 고용, 재화와 용역의 이용·공급, 교육, 행정서비스가 그것이다. 일부 반대자들의 주장처럼 ‘혐오 표현’만으로 처벌하거나 일상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다. 이 법의 핵심은 차별행위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중단시키고 피해를 구제할 것인지, 차별의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있다. 차별 구제 또는 차별 시정이 목적이다. 또한 기업·대학 등 개별 조직에 차별 금지와 다양성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각 조직이 스스로 정책을 수립하도록 유도하는 것, 즉 차별 ‘예방’이 중요한 법이다.

조선 최초의 여사(女史)를 다룬 MBC 드라마 <신입 사관 구해령>은 여사를 채용하자는 동지사 김안국의 제안에 중종이 ‘요즘 여인들은 글을 잘 몰라서’ ‘사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라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갔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약 그날 중종이 흔쾌히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였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MBC 제공

조선 최초의 여사(女史)를 다룬 MBC 드라마 <신입 사관 구해령>은 여사를 채용하자는 동지사 김안국의 제안에 중종이 ‘요즘 여인들은 글을 잘 몰라서’ ‘사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라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갔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만약 그날 중종이 흔쾌히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였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MBC 제공

<신입 사관 구해령>(2019, MBC)은 조선 최초의 여사(女史, 기록을 맡아 관리하는 여성 사관)가 소재다. 이 드라마는 실록에 기록된 ‘채용에서의 성차별’에 착안해 기획되었다. 여사를 채용하자는 동지사 김안국의 제안에 중종은 ‘요즘 여인들은 글을 잘 몰라서’ ‘사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라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갔다. 드라마는 ‘만약 그날 중종이 흔쾌히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였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가상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지만, 현실에서는 끝내 여성이 사관으로 활약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 시대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동아제약 사건이 공론화된 것이 2021년의 일이다. 서울메트로는 2016년 철도 장비 운전 분야 무기계약직을 공개 채용하면서 여성 지원자의 면접 점수를 일괄 조정하여 원래 합격권이었던 여성 지원자 6명을 탈락시켰다. 2017년 주요 은행 공채에서 성차별, 출신학교 차별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예 남녀의 합격선을 다르게 해놓기도 했고, 특정 학교 출신을 노골적으로 탈락시킨 예도 있었다. 채용 점수 조작 혐의로만 수백 건이 기소되었다. 2018년에는 여성 지원자 7명을 떨어뜨리기 위해 면접 점수를 조작한 박기동 전 가스안전공사 사장이 처벌받았다. 2020년 교육부의 종합감사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립대학들이 출신 대학별로 점수를 차등 부여해 직원을 선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표적인 예로 채용에서의 성차별을 들었지만, 현실에서 차별은 여러 층위에서 다양하고 복잡하게 작동한다. ‘노키즈 존’도, ‘히잡 착용 금지’도 내가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없는 게 아니다.

소수자들이 비로소 보통 사람이 되는 ‘차별금지법’[플랫]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에는 ‘평범한 사람이 가진 특권’에 대한 구절이 나온다. 일부만 가진 권력만 특권이 아니라, 일부만 배제하는 권리 또한 특권이다.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시외버스 탑승이, 성소수자 커플에게는 결혼이, 질환자에게는 건강한 사람 위주로 구성된 노동 조건 등이 특권이 된다. 특권을 가진 사람은 차별을 덜 인식한다. <60일, 지정생존자>(tvN, 2019)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감독은 차별금지법을 미루는 정치인에게 일갈한다.

“차별금지법은 특혜를 주는 법이 아니에요. 우리 같은 소수자들은 그 법이 있어야 비로소 보통 사람이 되는 거죠.”

취업·노키즈 존…우리 사회 만연
‘난 무관’하다 해서 없는게 아니다
차별금지법은 구제·시정이 목적
반대 측 ‘일상 규제’ 주장은 잘못
법 생긴다고 당장 현실 변화 없어
“소수자에게 특혜 주는 법이기보다
그 법이 있어야 우리가 보통 사람”



그런데,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들도 ‘차별은 나쁘다’라는 명제에 반대하거나, ‘나는 차별주의자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쟁점은 ‘어떤’ 요소가 차별 금지의 사유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2007년 법무부가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는 성적 지향, 학력,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병력, 출신 국가, 언어,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등이 삭제되어 있어서 비판받았다. 반대자들은 차별하려는 특성을 ‘차별해도 되는 것’ ‘차별할 만한 것’으로 분류하고 차별금지법의 대상에서 탈락시킴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방어하고자 한다. ‘내가 차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잘못되었으니까’ 자신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적 지향’. <60일, 지정생존자>는 레즈비언이 등장하고, 차별금지법을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보수 기독교의 공격을 받았다. ‘동성애 독재’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쓰는 반대자들은 왜 TV만 틀면 나오는 이성애 독재에는 반대하지 않을까(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니 대답은 필요 없다)?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는 ‘2가지 이상의 성별 등 차별 금지 사유가 함께 작용하여 발생한 차별행위’를 차별의 범위에 포함하고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 장애인은 각각의 사유로 차별받기도 하지만, 여성이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기도 한다. 이것이 ‘복합 차별’이다.

외국에서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갔던 친구가 당황해서 전화를 걸었을 때가 생각난다. 줄 서서 밤을 새우는 동안 주변 관객들과 대화를 했는데, 자신이 혼자 아시아인이고 나이가 많아서 소외당했다는 것이다. “야, 이거 인종차별이냐, 연령차별(에이지즘)이냐?!”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왜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해…? 둘 다지… 그나마 이번에는 성차별은 피해갔네.”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만행동 돌입 기자회견’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법사위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해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이날 “국회의 직무유기”라며 항의했다. 김혜리 기자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10만행동 돌입 기자회견’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 법사위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해 179개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이날 “국회의 직무유기”라며 항의했다. 김혜리 기자

이러한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차별 금지 사유를 ‘포괄적’으로 규정한 단일법을 두고, 차별행위에 대한 조치도 단일 기구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홍성수 교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여러 차별 금지 사유를 포함하는 큰 우산을 하나 만들고 좀 더 심각하고 중요한 차별에 대해서는 각각의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보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설명한다.

차별금지법이 생긴다고 해서 당장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수사기관이 수사하고 형사재판을 통해 처벌하는 ‘강성 규제’와 달리, 차별금지법은 연성 규제(soft regulation)라 변화가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의 안전 문턱이다. 내버려 둔다면, 차별 금지 사유는 혐오표현이나 증오범죄로도 이어진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기물 파손·폭행·방화·살인을 한다면 그것이 증오범죄다. 이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남 한복판에서도 살해당하는 현실에서 차별금지법은 더는 미룰 수 없다.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차별금지법을 미루는 정치권은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합의는 차별금지법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특정한 사유로 타인을 차별하면 안 된다’라는 상식에 맞춰져야 한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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