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학자 “위안부 日국가차원 동원”

2004.09.20 17:27

일본 역사학자가 위안부 동원에 일본 국가가 깊숙이 개입했으며 위안소가 일본군의 공식 시설로 운영됐음을 구체적 사료로써 입증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일본 교토대 나가이 가츠(永井和) 교수(일본 현대사)는 지난 18일 한국사회사학회 주최로 서울대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새로 발굴한 자료를 근거로 이같이 밝혔다.

日학자 “위안부 日국가차원 동원”

지금까지 일본 학계는 일본군의 개입을 인정하면서도 “위안부 모집 업자들이 군의 이름을 더럽히며 무리하게 모집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선의의 처지에서 관여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나가이 교수는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종군위안부 관계자료집성’의 문서들을 꼼꼼히 분석했다. 그가 주목한 문서는 1937년 12월21일 중국 상하이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장이 나가사키현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의뢰장. 이 문서는 상하이 총영사관과 육군 특무관실, 헌병대 등 3자간에 협의와 역할분담에 의해 일본군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상하이 총영사관은 위안부의 신분확인, 도항(渡航)상의 편의, 일본 및 식민지 기관과의 교섭을 맡으며, 헌병대는 영업주와 위안부의 수송과 보호·감독을 담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 특무기관은 위안소 시설확보·제공과 위안소 위생검사, 위안부의 성병검사 등을 담당한다고 적고 있다.

일본 와카야마현 지사가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보낸 문서 ‘시국 이용부녀 유괴 피의사건에 관한 건’(1938년 2월7일자)은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이 일본 경찰의 협조 내지 묵인하에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된다. 이 문서에는 “군부의 명령으로 상하이 황군(일본군) 위안소로 위안부 3,000명을 요청받았으며, 1938년 1월3일 육군 선박으로 나가사키현을 통해 위안부 70명을 헌병의 호위를 받아 송치했다”는 일본 위안부 모집업자의 진술이 담겨 있다.

나가이 교수는 또 “‘북중국 파견 군 위안부 모집에 관한 건’(1938년 1월25일자)이라는 야마가타현 지사의 문건에는 위안부 연령조건을 16~30세로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미성년 여성의 매춘을 금지하고 있는 당시 국제조약은 물론 일본 국내법을 위반한 것. 나가이 교수는 “위안부 모집업자들의 활동은 허용하면서 이들과 일본군의 관계는 은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모였다”면서 당시 일본 경찰 문서들은 국가가 위안부 동원에 깊숙이 간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파악했다.

그는 또 1937년 9월29일 제정된 일본 육군규칙 ‘야전 주보(酒保·물품 판매소·PX 같은 곳) 규정 개정’에 위안소 설치안이 들어 있음을 들어 군 위안소가 일본군의 병참 부속시설이었음을 밝혔다. 이 개정안의 제1조는 “야전 주보에 있어 필요한 경우 위안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가이 교수는 1937년 12월 중순에는 중국 화중(華中)의 일본육군을 총괄하는 군사령부 차원에서 위안소 설치가 결정되었으며 사령부 지시 아래 각 군에 위안소 설치 지시가 하달됐음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군 위안소를 ‘장병들의 성욕을 처리하기 위해 군이 설치한 병참부속 시설’로 규정했다.

“군과 국가로부터 성적 ‘봉사’를 요구받던 위안부는 특히 식민지 여성에게는 성노예제와 같았다”는 결론이다. 이날 학술발표회는 정진성(서울대)·이정옥(대구 가톨릭대)·윤명숙(히토츠바시대 박사)·스즈키 유코(일본 게이자이대) 등 위안부 연구자는 물론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의 윤정옥 지도위원, 신영숙·강정숙씨 등이 참여해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조운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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