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설계 건축가 박승홍

2005.10.30 18:18

집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속이다. 사람들은 ‘밥과 자유’와 더불어 집을 위해 긴 역사 속에서 투쟁해왔다. 그래서 집은 삶의 원형질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다.

[사람속으로] 국립박물관 설계 건축가 박승홍

이 땅을 대표하는 ‘집 중의 집’이 문을 열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28일 60년간의 더부살이를 청산하고 번듯한 새집으로 이사해서 집들이를 끝냈다.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의 영혼이 고스란히 녹아있고, 장차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기록되어 보존될 소중한 집이 드디어 문을 연 것이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을 하루 앞둔 27일 오후. 서울 이화동 정림건축의 사무실에서 건축가 박승홍씨(51·정림건축 디자인설계 총괄사장)를 만났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개관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다. 그가 이 집의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들에게 당장 가보지 말고 시간이 지난 뒤에 가보라고 할 생각입니다. 현수막과 화환으로 뒤덮인 박물관에서 건축과 유물을 꼼꼼하게 감상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거든요.”

반백의 머리, 사람 좋은 미소, 차분하면서도 정감 어린 말투 너머로 해냈다는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듯했다. 펜을 잡고 대형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대장정을 마무리했으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95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 설계안 공모에는 세계 46개국 341점(건축가 850명 참여)이 접수됐다. 그 당시 박승홍씨가 주도한 정림건축의 설계안이 1등 당선작으로 뽑혔다.

“어떻게 하면 한국적일 수 있을까. 우리의 선조들이라면 과연 어떻게 설계했을까. 그런 질문 앞에서 수없이 고심했어요. 그 당시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갔었죠. 그곳에서 자연미를 살린 질감과 독특한 공간배치, 크고 작은 돌들이 어우러져 펼쳐보이는 절묘한 조화에 감동했어요.”

먼곳에서 건물에 가까이 갈수록 질감이 고와지는 경험과 마치 성벽(城壁)을 연상케 하는 박물관의 벽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거울못과 열린마당이다.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맨처음 관람객들이 만나는 거울못은 계절마다 웅장한 박물관 건물을 투영(投影)하는 거울 역할을 한다. 모든 물들이 한데로 모이는 저수지(貯水池)이자 통일을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박물관에 들어서는 관람객들이 건물을 완상(玩賞)하면서 천천히 사색의 공간으로 에돌아갈 수 있도록 배치했다. 열린마당은 박물관 중심에 시원하게 배치된 공간으로 한옥으로 따지면 대청마루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보면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죠. 언젠가 미군기지가 철수하면 지금의 후정(後庭)으로 정문이 생길 겁니다. 박물관이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와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거기에 담았습니다.”

설계자로서 남과 북, 산과 물의 조화를 꿈꾸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건설과정에서 자문위원회조차도 거울못과 열린마당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절망스러웠다. 그러나 건축가로서 그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루브르박물관의 피라미드는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나리자와 함께 그 건축물을 루브르의 상징물로 기억하죠. 거울못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권위주의적 상징성을 앞세운 논리였어요. 그걸 끝까지 지켜낸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분명 ‘늦깎이 건축가’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가 건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가 조경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틈만 나면 나무와 돌을 사 나르고 집안을 꾸미셨죠. 아마 그 영향이 컸었나 봅니다. 또 누이들이 모두 조각가나 서양화가가 된 걸 보면 예술적 피를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건축가를 꿈꾸는 그가 입학할 대학은 기껏 공대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한 그는 베를린대학을 거쳐 미네소타 건축대학을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 건축대학원을 다녔다. 뉴욕주립대 건축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그는 건축가로서 미네소타와 캘리포니아 등지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건축가들의 영예인 Merit Award, Honor Award AIA 등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17년 만의 외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해서 처음 맡은 작업이 국립중앙박물관 설계였던 셈이다. 그런 그가 박물관 개관식의 초청자 명단에서 제외돼 있었다. 예술가를 인정하지 않는 이 땅의 고질병이 문화행사에서조차 드러난 셈이다. 그는 섭섭함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10년간 일하면서 갈등도 많았어요. 지인들은 왜 미국으로 가지 않느냐고 묻곤 합니다. 건축가에 대한 인식도 월등히 낫고, 부를 쌓기에도 여기보다 훨씬 여건이 좋거든요. 집들이를 하면서 집을 설계한 사람을 초대하지 않는 나라이니 실망스럽죠. 그래도 이 땅에서 제가 할 일이 아직 많아요.”

대한민국은 숭숭 구멍이 뚫린 밀가루 반죽을 닮았다고 비유했다. 그가 10년 전에 귀국해서 만난 서울은 ‘거대한 괴물’로 변해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개발독재’의 논리에 빠져있는 서울을 보면서 건축가로서 속이 상한다. 환경은 생각지 않고 마구잡이로 들어선 빌딩들이 저마다 제 잘났다고 으스대며 서 있는 꼴이 못마땅하다.

“여전히 형편없고 하루하루 짓밟히는 느낌으로 살아가지만 내 나라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의미가 있잖아요. 뭔가 부족한 걸 채우고 싶다는 욕구도 강합니다. 모든 것을 자본과 직결시키는 건설업자들의 논리와 물량이나 크기로만 판단하는 위정자들의 논리와도 싸우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없이 밀어붙이는 이 땅의 문화가 그는 여전히 못마땅하다. 청계천 문화관을 설계했던 그는 정책 결정자의 밀어붙이기로 하루아침에 수로를 뚫은 뒤 환호하는 태도도 마뜩찮다.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4만평이나 되는 설계도면을 그려내야 한다고 다그쳐서 좀더 생각할 시간을 빼앗긴 것도 여전히 아쉽다.

오늘. 이제 그가 설계한 집은 사람들의 품속으로 돌아갔다. 집이 생명을 얻는 것은 그것을 살맛나게 관리하고 찾아주는 사람들의 몫이다.

“건축은 땅과 건축주의 요구를 잘 묶어서 가장 적합한 그릇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릇에 담긴 요리보다 그릇이 도드라져 보이면 실패한 건축물이죠. 사람들이 건물보다는 그 안에 담긴 재미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이제 국립중앙박물관은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초등학생부터 촌로들까지 반가사유상 등을 마주하며 역사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박물관이 찾고 또 찾고 싶은 건강한 놀이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오광수 기획취재부장 ok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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