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도서출판 점자

2009.10.25 17:04 입력 2009.10.26 09:34 수정
YeSS 신지혜(이화여대 3년)·허건(고려대 2년)

점자책 등 제작… 2대째 ‘시각장애인의 눈’

유명 그림 입체화… 지하철 노선·전화번호부 점자화

해독 못하는 사람들 위해 음성도서 활성화 고려도 

보건복지가족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을 통해 실시한 ‘2008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은 23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93%는 사고 등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전국민 가운데 이 23만명만 인쇄물 등을 읽지 못하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예단하면 큰 오해다. 한국점자도서관에 따르면 전국민의 약 10%가 시각장애를 포함해 저시력, 난독증 등의 이유로 책을 읽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독서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대체도서’는 조금 과장하면 몇권 안 된다. 시각장애인에게 한정해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 1년에 출간되는 5만여종의 도서 가운데 점자화하거나 음성 녹음되는 비율은 2% 정도다. 책 자체가 부족하니 시각장애인 등의 도서관 이용률이 떨어진다.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점자도서관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은 전체의 0.2%에 불과했다.

사회적기업 탐방단이 지난 7일 서울 강동구 암사동 사회적기업 도서출판 ‘점자’를 방문해 육근해 대표로부터 점자책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육 대표,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최상권 회계사, YeSS 신지혜·허건씨, 도서출판 ‘점자’ 박윤미 과장, 함께일하는재단 이은애 국장, 라현윤 과장.   사진 문준호(동국대 4년)

사회적기업 탐방단이 지난 7일 서울 강동구 암사동 사회적기업 도서출판 ‘점자’를 방문해 육근해 대표로부터 점자책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육 대표,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최상권 회계사, YeSS 신지혜·허건씨, 도서출판 ‘점자’ 박윤미 과장, 함께일하는재단 이은애 국장, 라현윤 과장. 사진 문준호(동국대 4년)

도서출판 ‘점자’는 독서장애인들을 위한 대체도서를 만드는 사회적기업이다. 관련 제도가 생긴 지 얼마 안 돼 사회적기업으로는 이력이 짧지만, ‘점자’의 육근해 대표는 선친의 뒤를 이어 2대째 시각장애인의 눈으로 살고 있다. 육 대표의 부친은 1969년 사재를 털어 서울 종로에 한국점자도서관을 세운 육병일 관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도서관이었다. 연간 3000여권을 시각장애인에게 대출했다. 97년 육 관장이 타계한 이후 도서관장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은 육 대표는 2004년 점자책 등 대체도서 제작을 전문으로 한 도서출판 ‘점자’를 세웠다. 현재까지 8000여종의 점자도서, 3000여종의 ‘라벨 도서’, 30여종의 ‘촉각도서’를 출간했으며 음성도서와 활자 크기를 키운 ‘큰 글자 도서’도 만들고 있다. ‘점자’에서 만드는 점자도서는 국내 공급물량의 70%에 해당한다.

일반인이 알고 있는 점자책은 ‘글씨가 전혀 없이 오직 점자만 파인’ 흰 종이묶음이다. 따라서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전통적인 점자책을 해독할 수 없다. 2006년부터 본격 생산되고 있는 ‘라벨 도서’는 일반도서에 점자가 인쇄된 투명한 라벨을 매쪽마다 덧붙인 책이다. 묵자(墨字)와 점자가 혼용돼 있어 일반인과 독서장애인이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라벨 도서의 가장 큰 장점이다.

[사회적기업이 희망이다](30) 도서출판 점자

‘촉각도서’는 점자를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출판에 시각장애인 복지를 결합했다. 시각장애인 어린이들이 손이 아파 점자를 읽지 않으려고 한 것에서 착안했다. 전래동화 ‘햇님달님’에는 주인공 남매를 쫓는 호랑이가 썩은 동아줄을 잡고 올라가다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촉각도서’는 이 장면을 화면으로 구성한다. 썩은 동아줄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 새끼줄을 납작하게 붙이고 호랑이의 팔과 다리에는 털 달린 천을 대는 등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책’이다. 동식물도감에는 한쪽에는 점자로 기린의 이름과 설명을 넣고, 반대쪽에는 최대한 실제 기린에 근접한 모양을 넣어 손으로 직접 동물의 형태를 만질 수 있게 했다. 뱀, 북극곰 등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동물의 느낌에 근접한 재료를 활용해 시각장애인이 보는 것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배려했다. ‘촉각도서’는 인지훈련에 효과가 있어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시각장애 아동이나 치매노인에게 제공된다.

도서출판 ‘점자’는 최근 고흐 등 유명 고전 화가의 그림을 입체화한 책을 만들어냈다. 등고선을 그리듯 명화의 윤곽을 따라 겹겹이 종이를 덧붙여 그림을 재현했다. 육 대표는 “독서장애인들이 더욱 다양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개발하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라고 명화를 감상하지 말란 법은 없다”고 말했다. 지하철 노선도, 전화번호부, 우편번호부 등 생활정보를 점자화했고 문화체육관광부의 의뢰로 점묵자 혼용잡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도 출간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고령자 등의 저시력자를 대상으로 한 ‘큰 글자 도서’를 출판하고 있다. ‘큰 글자 도서’는 글자를 18포인트로 확대해 노인 등이 돋보기 없이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도서출판 ‘점자’는 2008년에 3만7810권의 책을 생산했다. 주문받아 제작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매출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게 경영상의 어려움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책값. 독서장애인 도서의 제작원가는 일반 도서보다 많게는 8배까지 높다. 점자책은 아직까지 수작업으로 생산된다. 각 페이지에 해당하는 점자 알루미늄판에다 종이를 넣고 찍어내는 방식이다. 책의 모든 쪽을 이렇게 일일이 찍어내야 한다. 점자책은 두께가 통상 일반 도서의 6~10배로 불어난다. ‘촉각도서’는 점자책과 마찬가지로 수작업인 데다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책값이 훌쩍 올라간다. 권당 가격이 8만원에 육박한다. 활자의 크기를 키운 ‘큰 글자 도서’는 다른 독서장애인 책에 비해 제작과정이 단순한 편이지만 분량이 원본의 2~3배로 늘어난다.

개인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기에 도서출판 ‘점자’의 책은 대부분 점자도서관이나 국립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 등 관련 기관에 납품된다. 독서장애인이 직접 주문을 할 때는 책정한 판매가의 50%에 판다.

‘대체도서’를 만드는 데 또 다른 어려움은 저작권. 점자나 라벨 도서를 만들는 데 원칙적으로 저작권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저작권법 제33조 1항에 ‘공표된 저작물은 시각장애인 등을 위하여 점자로 복제·배포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어 출간된 책을 점역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 다만 제작과정에서 출간된 책의 전체 내용을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원본 파일을 직접 넘겨받는 게 최선이지만 그다지 원활하지는 않다. 반면 출간했거나 출간 예정인 ‘큰 글자 도서’ 39종은 한 종을 빼고는 모두 저작권료를 지불했다. 육 대표는 “점자도서 등 대체도서는 기존 출판시장의 위협요소가 되지 않고, 공익성을 띠는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내 원고를 점자, 혹은 큰 글자 도서로 출판해달라’고 의뢰하는 저자와 출판사가 증가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책을 찍어내는 능력에 제한이 있다 보니 어떤 콘텐츠를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 고민거리다. 도서출판 ‘점자’가 운영하는 ‘북소리버스’는 일주일에 수 차례 서울농학교, 서울맹학교, 한빛맹학교의 학생들에게 찾아가는 ‘책 버스’다. 담당직원이 아이들과 책을 함께 읽고, 이들이 어떤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의견을 수렴한다. 한국점자도서관의 이용객들이 어떤 책을 원하는지 의견을 주고 가기도 한다. 복지관을 돌아다니며 설문조사를 하거나 시중 서점에 나가 출판동향을 알아보는 시장조사가 병행된다. 최종적으로는 선정위원회를 통해 어떤 책을 점자도서, ‘큰 글씨 도서’로 만들지 결정한다.

도서출판 ‘점자’는 이밖에 지적장애인도 독서장애인의 범주로 생각하고 그들을 포괄할 수 있는 대체도서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도서출판 ‘점자’의 박윤미 과장은 “ ‘점자’에서 하는 일은 공익성이 강한 것이기 때문에 정책과 입법 등에서 적극적인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며 “동시에 민간 출판시장에서도 ‘독서장애인’ 대상 출판이 활성화할 수 있도록 관심과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치용 ERISS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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