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한다

2012.04.15 20:55 입력 2012.04.15 21:05 수정
강신주 | 철학자

청량리로 가는 무궁화 열차를 양평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젊은 아가씨가 내게 조심스레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강신주 선생님 아닌가요?” 순간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기억을 일깨워주려는 생각에서인지, 그녀는 5년 전 대학 신입생 때 철학입문이란 내 강의를 들었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제서야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낯익어 보였다. 강의 때마다 가급적 모든 학생들과 눈을 한 번은 맞추려던 노력의 결실이었을까. 서둘러 열차에 올라타 좌석을 잡은 뒤 그녀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영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는 취업 걱정 때문에 벌써 휴학도 한 차례 했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명문 사립대, 그것도 영문과를 다니는 수재가 취업을 걱정하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그녀처럼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그럼에도,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한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물어보았다. “얘야. 너는 꿈이 뭐니?” 잠시 당혹감을 드러내고는 그녀는 말한다. “그냥 편하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쉬었으면 좋겠어요.” 어, 이거 분명 크게 잘못되었다. 내 제자는 꿈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소망스럽게 키워나갈 수 있는 꿈일 수 있겠는가. 하루 종일 들판에서 쟁기를 끌던 소나 품을 수 있는 꿈 아닌가. 말이 꿈이지, 이것은 그냥 삶에 지쳐 쉬고 싶다는 불행의 절규일 뿐이다. “너, 꿈이 없구나. 아니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구나.”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꿈과 현실 사이의 관계, 그 진실을 말해주었다. 꿈을 가진 사람만이 현실을 가질 수 있다고. 아니 정확히 말해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극복할 수 있는 현실, 혹은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어느 소년이 아이거 북벽을 오르려는 꿈을 가졌다고 하자. 반드시 이루어야 할 꿈을 가진 순간, 소년은 압도적인 아이거 북벽과 아직은 나약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 즉 엄연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니 거벽을 오르려는 꿈을 품은 소년에게는 고뇌가 찾아오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아이거는 등반에 능숙한 사람도 오르기 만만치 않은 괴물이니까. 등반의 꿈을 품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소년은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등반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어서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등반의 꿈을 가지고 아이거를 올려다볼수록, 소년에게 아이거는 더 자신을 압도하는 것만 같다. 꿈을 가지면 현실은 항상 더 큰 현실성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꿈이 열어놓은 현실이 너무나 압도적일 때, 소년은 아이거에 오르겠다는 꿈을 접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순간 소년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아이거는 위험한 그 무엇으로 보이기보다는 그저 나와는 무관한 하나의 웅장한 풍경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일러스트 | 김상민

▲ “인간에게 두 가지 현실이 있을 수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하는 순간, 이상주의자는 그것을 방해하는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현실주의자가 항상 위대한 이상주의자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억압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이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명저 <자본론>이 탄생한 이유가 아닌가. 그러니 잊어서는 안된다. 냉정한 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의 힘도 그가 품고 있는 꿈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꿈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만이 남게 된다. 실천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관조하고 순응하면 되는 풍경으로서의 현실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을 수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불행히도 내 제자는 후자의 현실만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현실에 적응하느라 경황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인간적인 희망이 그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그녀의 낯빛은 그렇게도 무기력했고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어보았다. “얘야. 대학에 갓 들어왔을 때 너의 꿈은 무엇이었니?” 신입생 시절을 되돌아보아 그런지 그녀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저는 제일 행복하거든요.” “그런데 왜 그 꿈을 접었니?”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학교에는 사범대가 없고, 또 있다고 해도 경쟁이 너무 심해서 선생님이 된다는 것, 그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꿈을 접은 이유를 설명하다가, 그녀는 내가 방금 전 건넨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시무룩해지며 곧 말문을 닫았다.

속절없이 기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했고, 그녀는 학교에 가야 한다며 총총히 떠났다. 하지만 나는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꿈을 너무나 쉽게 포기한 내 제자가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안타까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자식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아이거의 수십배나 될 정도로 높은 현실의 벽을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현실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현실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자유주의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바뀔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이라는 생각을 독가스처럼 전파시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집권 여당은 이런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그것을 세상에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꿈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인간이 극복해야 할 현실을 극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기에 나는 총선을 조바심 속에 기다렸다. 총선을 통해 나는 우리가 현실의 벽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수 있는 사회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우울함과 무기력을 감당하면서 인간은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불행히도 나의 믿음과 확신은 절실한 기다림만큼이나 깊은 절망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직도 순응해야 할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보수주의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이나마 내게는 환멸이 찾아들었고, 좋은 사회에 대한 꿈을 접을 뻔했다. 아찔했다. 꿈을 포기하는 순간, 내 자신은 극복해야 할 현실을 망각한 보수적인 철학자, 아니면 잘해야 염세주의적인 철학자로 전락하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의 벽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모든 이가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사회, 그 사회에 대한 아름답지만 더 강해져야만 하는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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