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지금’을 신뢰할 뿐이다

2012.05.21 21:10
변영주 영화감독

우연히 과방에서 보게 된 광주항쟁에 관한 불법 유인물의 희미한 사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수업시간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복경찰에 의해 이름도 모르는 어떤 학생이 끌려갈 때 누구도 그걸 막거나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던 그날의 부끄러움이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점심시간, 같이 점심을 먹을 누군가도 없는 상태. 혼자 밥을 먹는 게 뭐해서 학교식당 한편에서 열심히 신입생을 대상으로 자신의 서클을 선전하던 어느 선배의 선한 눈매가 좋아 보여 시작했던 것일 수도 있고, 가본 적도 없지만 안개 가득한 런던의 아침이 이런 걸까라는 심정으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매캐한 최루가스 사이를 방황하던 어느 날의 서슬 퍼런 결심일 수도 있다.

[별별시선]이제 나는 ‘지금’을 신뢰할 뿐이다

그렇게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던 나 혹은 누군가에겐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던 그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 어떤 날이 있다. 내 경우 시작은 시시껄렁했다. 여대를 다니던 나에겐 안전하고 지속적인 흡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더 이상 화장실이 나의 흡연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해선 안된다는 어떤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이 나에게 있었다. (흡연은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서클 생활.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분명히 나를 노리고 놓아 둔 것임이 분명한 광주항쟁 자료집. 그 자료집을 집으로 가져가기까지의 그 파란만장한 여정. 시작이 시시껄렁한 만큼 난 누구보다 겁이 많았고 언제나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앞에 선 친구들이 다치고 연행당할 때 가장 비겁한 위치에 나는 서 있었다.

그런 시간들, 이를테면 파란 하늘을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럽던 그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만드는 일을 선택한 이후, 언제나 내 소원은 ‘이제는 비겁하지 않은 선택과 행동을 하는 나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원의 언저리엔 항상 그때 내 앞에서 세상을 향해 전진하던 멋진 친구들, 선배들의 모습이 기준점이 되곤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아주 많이 흘렀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발포 명령자는 아직도 모든 권력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말도 안되는 억울한 죽음들은 우리 곁에 놓여있다. 고작 스무 살 주제에 세상의 모든 고민을 껴안고 있는 듯이 결연한 결심을 하던 우리보다 지금의 스무 살이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동안, 현실적 조건과 욕망의 기준점이 이미 시대를 넘어 너무도 달라져 있음에도 “투표도 안 하는 20대 어쩌고”하며 어른인 척 욕을 하는 당신이, 어느덧 당신의 투쟁 경력이 권력으로 보상받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당대의 다양함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과거의 영웅담에 둘러싸여 누구한테나 충고부터 하려는 당신의 그 무게 잡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기필코 당신을 이해하려 애써왔다. 나의 세대니까, 내가 도망쳤던 현실을 이끌어온 당신이니까.

그러나 이젠 정말 못 참겠다. 나는 요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을 보며 이제 나의 세대 즉 1980년대 세대에 대한 존경을 버리려고 한다. 그토록 비겁했던 나의, 아직까지 남아있는 부채와 죄의식은 고스란히 당신들이 아니라 세상의 해고된 모든 분들과 20대에게 드리려고 한다. 정확하게 말해보자. 지금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은 소위 엔엘(NL)과 피디(PD)의 사상투쟁이 아니다. 정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답게 애쓰며 살려는 태도의 문제다. 민주주의의 문제다. 그렇다. 우리가 적어도 간직해야 할 최소한의 것을 당신들은 버렸다.

과거의 투쟁경력이, 당신의 청춘이 차가운 감옥에서 소모되던 그 역사가, 당신의 희생이, 한낱 중세 교황이 날려주던 면죄부처럼 현재의 모든 것을 덮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청춘이 그토록 경멸하던 그 괴물이 된 것이다. 최소한의 가치도 증발된 당신에겐 더 이상 자유와 권리를 말할 자격조차 박탈되었다. 그 치욕스러운 부정과 반민주적인 폭력사태를 목도한 그날 나는 하염없이 존 레넌의 ‘God’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존 레넌 스스로가 믿고 신뢰하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비틀스마저도 믿지 않는다는 그의 통렬한 자기고백에 감정이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 역시 현재를 믿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신뢰는 어느 순간 증명서처럼 발급되어져 유통기한 없이 인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의 결기 같은 선택 속에서 시험받고 선언되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적어도 우리의 후배세대들을 걱정하는 심장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딛고 서있는 공간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40대라면 지금까지 해온 무엇보다 해야 할 무엇이 더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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