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좌파’ 여성과 ‘삼포’ 남성의 연대

2012.11.22 21:23
정희진 | 여성학 강사

김성주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공동위원장의 정체성(?), ‘재벌 좌파’는 인상적인 자기 소개였다. 애초 그녀의 문제의식은 김용철 변호사와 비슷했던 것 같다. 김 변호사의 지적대로, 대선 후보들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난센스다. 기업이 세금 내고 법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지 그게 무슨 민주화, 심지어 선거 공약이란 말인가? 이 나라는 자본주의도 이상(理想)이 된 이상한 사회다.

‘인삼 쿠키’도 여성의 사회 참여에 대한 그녀 나름의 상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영계’만큼이나 부정적이었다. 이 땅의 아이 엄마들은 재벌가 출신의 전문 경영인이자 유력 후보의 선거 ‘대책’위원장으로부터 게으름, 창의력 없음, 수동적이라는 요지의 훈계를 들었다.

[정희진의 낯선사이]‘재벌 좌파’ 여성과 ‘삼포’ 남성의 연대

한편, 적지 않은 남성들은 우리 사회가 여성 상위를 넘어 여성 특혜 공화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보기에 여성은 군대도 안 가고, 별 노력 없이 얼굴만 예쁘면 쉽게 돈 벌고, 남자만 잘 만나면 쇼핑으로 시간을 보내며, 남편 월급은 아내 통장으로 들어간다.

최근의 여성 혐오 세태를 비판한 영화감독 이송희일의 글은 보다 구체적이다. “이들이 보기에 현대 여성들은 스타벅스를 즐기는 된장녀들이며, 운전대 잘못 놀려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도로 위의 김 여사들이며, 죠리퐁 여성가족부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보호하는 특별한 지위의 보슬아치 종족이다….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기형적인 분배 시스템에서 낙오된 삼포세대(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가 자신의 처지를 여성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천년간 외모로 핍박당하는 일은 여성 전담이었는데, 이제는 남성도 키 작고 머리숱 없으면 루저 취급이니 그 심정, 어떻겠는가.

피상적으로 보면 이들의 현실 인식에 공감이 간다. 나는 양쪽이 반대 입장에 있으면서도 같은 결론인 점이 흥미롭다. 즉 여성을 위한다는 김성주 위원장은 “여성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여성이 미운 일부 남성들은 “열심히 살지 않는데도 잘 먹고 잘산다”고 분노한다.

공사 영역에 걸쳐 대한민국 여성의 노동량은 2위를 한참 따돌리는 세계 1위다. 통계청 통계에 의하면 2012년 3월 현재, 남녀의 평균 임금 격차는 100만원 대 61만3000원.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취업 여부에 상관없이 남성의 6배이고, 노동시장 진출의 질은 104위권 밖이다. 일상의 (성)폭력 위협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이런 수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원래 성별 문제는 계량화하기 힘든 사회 제도다. 통계로는 파악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노동이 더 심각하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사회 인프라, 특히 사회복지는 여성의 성역할 노동에 거의 전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다. 누가 게으르단 말인가? ‘피해자 여성’은 이 글의 주제도 개인적 관심사도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 않겠지만, “대한민국 여자들은 논다”는 이 황당한 인식은 분석이 필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타인의 삶에 대한 무지, 여성에 의해 제공되는 유·무형의 보살핌 노동이 당연하다는 특권의식, 그리고 남성의 경우 자기가 게으르니 남도 그럴 것이라는 투사가 저변에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이 나라 2500만 여성의 처지가 모두 다른데 극소수 여성을 과잉 재현, 이들만 여성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여성은 실재하지 않는다. ‘갓난아기를 키우면서 글로벌 쿠키를 팔 수 있는 여성,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품 매장과 카페를 전전하는 젊은 여성’이 가능한 현실이겠는가. 혐오와 증오의 차이는 대상의 존재 여부다. 혐오는 대상이 없고 증오는 구체적 대상이 있다. 혐오는 대상이 없으므로 상대의 실제 문제와도 무관하다.

‘된장녀’와 ‘청담동 며느리’의 다른 이름은 세련된 미시족인데, 이들이 남성사회가 생각하는 진짜 여성이다. 나머지는 ‘아줌마’ ‘창녀’ ‘호박’ ‘민중’ 등으로 분류된다. 절대다수 여성의 현실은 여성이 아니라 비정규직, 빈민, 10대 등 다른 범주로 분석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부르주아 여성을 여성 대표로 상정하기 때문에 ‘여성 상위’라는 착시가 가능한 것이다.

중산층 여성 이미지는 상층 남성이 계층 간 충돌을 막기 위해 장착한 범퍼다. 낮은 계층의 남성은 권력층 남성에게 대항하기보다 ‘적의 여자’인 중산층 여성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계급적 적대감을 ‘부르주아 남성’이 아니라 ‘부르주아 여성’에게 퍼붓는다. 이 구조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김기덕 감독의 초기 작품들이 그토록 논쟁적인 이유다.

여성인 김성주 위원장의 계급 차별주의와 좌절한 일부 남성의 성차별 피해(?)의식의 결합. 이것이 우리 사회 일상의 정치학, 여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함부로 발언할 수 있는 토대다. 남성은 스타벅스 커피 안 마시나? 욕설, 침,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던지는 남성 운전자도 ‘김 여사’만큼 비난받는가? 남성 실업자에게도 “일 없다고 놀지 말고 기저귀 빨래하면서 쿠키를 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