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위안부 해법,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의 민족주의도 걸림돌

2013.08.09 21:00 입력 2013.08.09 22:27 수정

▲ 제국의 위안부…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328쪽 | 1만8000원

2011년 12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1000회를 맞아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한복, 단발머리, 맨발의 소녀는 움켜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많은 한국인들이 간직한 군위안부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는 이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는 대부분 20대였고, 정규교육을 받을 만큼 부유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기에 학생에게 어울리는 단발머리를 할 가능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박 교수는 단지 조각상의 고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조각상은 제국과 식민지, 계급 격차 등 군위안부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을 모두 삭제한 채, 오직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강간당한 뒤 버려진 가련한 소녀만을 기린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의 뒤에는 ‘정의의 독점’을 꾀하는 한국, 일본의 강경파들이 있고, 이들이 문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책과 삶]위안부 해법,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의 민족주의도 걸림돌

그래서 <제국의 위안부>는 분명 논쟁적이다. 앞서 위안부 문제를 다룬 전작 <화해를 위해서>(2005) 역시 그랬다. 한국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는 여전히 뜨겁다. 일본엔 혐한 분위기가 일고 있고, 보수 정권은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를 보인다. 이 시점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입지는 더욱 취약해졌을 수도 있다. 박 교수도 <제국의 위안부> 서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상황은 당시(<화해를 위해서> 출간 시)보다 훨씬 나빠졌다”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가 말하는 위안부란 어떤 사람들인가. 일찌감치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했던 일본은 식민지로 떠난 자국인들이 향수에 젖거나 ‘불편’을 호소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라유키상’을 파견했다. 가라유키상이란 해외에 돈을 벌러 떠나는 여성을 일컫는 말로, 사실상 해외 일본인 거주지에 있는 공창의 유녀를 뜻한다. 가라유키상은 강력한 국가권력, 가부장제 아래 있는 가난한 여성의 고난을 보여준다.

조선인 군위안부의 기원은 가라유키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전쟁을 하던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의 수요가 급증했는데, 일본 여성만으로는 그 수를 감당할 수 없자 식민지 조선의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집의 주체와 방법에서 논란이 있다. 한국에서의 인식과 달리, 조선인 군위안부는 일본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기보다는 조선의 지방관료, 매춘업자들이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돈을 벌게 해준다거나 쌀밥을 먹게 해준다는 꼬드김으로 데려갔다는 증언이 많다. 물론 박 교수가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이 이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강제성’을 만든 일본 정부를 면책하지 않는다.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설령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매매춘에 나섰다 하더라도, 세상이 멸시하는 일을 선택한 것은 그녀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남성, 군대, 국가 그리고 일본 제국에 최종 책임이 있다. 다만, ‘현실적 강제성’을 따져묻기 시작하면, ‘우리 안의 협력자들’까지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는 오늘날 같은 처지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중국, 네덜란드 출신 위안부와 조금 달랐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라는 말에서 ‘조선’이란 국적이 아닌 출신지일 뿐, 이들은 서류상 일본인이었다. 국적이 조선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성을 착취당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겠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적의 여자’가 아니었기에 일본군의 가족, 연인의 역할까지 하도록 요구받았다. 조선 출신 일본 군속이 그러했듯, 조선인 위안부들은 중국, 인도네시아 등 현지인들에게 ‘적’ 취급을 받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없었다는 한국인의 인식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절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박 교수는 1993년 일본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 명의로 발표된 ‘고노 담화’와 이후 만들어진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한다. 고노 담화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위안부 이송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을 인정했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이 위안부 본인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고 참혹했다는 점도 적시했다.

사회당수인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이끌던 일본 내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보수적인 자민당 의석수가 사회당의 세 배였던 당시 의회에서는 관련 법제를 만들기 불가능했다. 일본에서는 과거청산 문제가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이 주류였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내각이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아시아여성기금이었다. 국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 차원에서 기금을 마련해 보상금과 함께 무라야마 총리의 편지를 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보상금을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한국의 여론은 이것을 받아들이면 일본 정부 차원의 사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 보상사업에는 52억엔의 돈이 들어갔고, 이 중 90%가 정부 예산이었다. 그리고 보상금과 일본의 사과를 받아들인 위안부도 61명이 있었다. 여전히 수요집회에 나가는 ‘투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박 교수는 주장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서 위안부는 당사자인가. 박 교수는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지원 단체를 비판한다. 그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으로 응원받고 있는 위안부 지원운동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일본의 위안부 지원운동은 피해 여성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일본의 보수적 정치 구도를 혁파하려는 좌파 진영의 수단에 그친다고 본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 위안부 문제의 해결 책임은 여전히 일본 정부에 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은 전쟁 후 처리에 대한 것일 뿐 식민지 지배 전체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한 전(前) 제국 국가는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이 한일협정의 시대적 한계를 먼저 인정하고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해 반성한다면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

1990년대의 사죄와 보상도 아쉽다. 박 교수는 당시의 문제는 보상 주체가 아니라 보상 태도였다고 지적한다. 국가보상에 가까웠는데도 정부의 관여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고, 인도네시아, 중국, 조선 출신 위안부에 대한 구분도 섬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일본의 보수 정치인들은 여전히 “20세기는 인권이 세계 각지에서 침해당한 세기였는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넓은 의미의 강제성은 있었지만 좁은 의미의 강제성은 없었다”(아베 신조)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다시금 고조되는 지금 상황에서 일본은 외부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고 박 교수는 제안한다. 일본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많다는 점을 피해자와 국제사회가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위안부는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의 문제이자 자본의 문제였다. 돌아보면 제국주의 일본만이 위안부를 동원했던 건 아니다. 위안부는 “일본의 천황제나 일본의 군사주의가 아니라 국가세력을 유지/확장시키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는 국가 시스템이 만든 문제”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2차 세계대전의 승전 이후 한국, 일본에 기지를 둔 미군 기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제 이곳 기지촌에는 한국인 여성 대신 조선족, 러시아, 페루, 필리핀 여성이 대거 들어왔다. 조선인 군위안부뿐 아니라 이들 모두가 피해자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가로막는 모습을 비판한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도덕적 오만을 경계하자고 제안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모습의 ‘피해자’로 박제화해 ‘투사’나 ‘민족의 딸’로 만들기보다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박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친일파 소리를 듣기 딱 좋다. 실제 인터넷에서는 그를 두고 ‘위장한 일본 우익’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된 대담하고 논쟁적인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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