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옥션’과 잉여사회

2013.09.23 21:28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세계화의 전도사’인 토머스 L 프리드먼은 국내에 2005년 말 소개된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구촌 경제체제, 즉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와 자유가 주어지는 세계화”를 거스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책을 움직이는 축은 한마디로 ‘아웃소싱’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소개한 한 신문의 기사 제목은 “인도 가난한 소년이 하버드 여대생 일자리를 빼앗는다”였습니다.

이 책이 나온 후 보수 논객 공병호 박사는 “세계화는 세계 전체가 자원 배분의 합리성을 더욱 높여가는 일련의 과정이란 특성을 갖고 있다. 협소한 시야에서 보면 날아가 버리는 일자리에 분노할 수 있지만 시장의 확대는 대다수 사람에게 전문화와 분업의 이점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며 프리드먼의 주장을 적극 옹호하는 글을 한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한기호의 다독다독]‘글로벌 옥션’과 잉여사회

공 박사는 “평평한 세계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조직이나 국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며, 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자신의 일이 ‘아웃소싱의 대상이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은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이 세계는 세상을 어두컴컴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암울함과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겠지만 변화의 흐름을 직시하고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에겐 대단히 역동적인 미래가 펼쳐지고 있다”고 속삭였습니다.

필립 브라운, 휴 로더, 데이비드 애쉬턴 등 세 사람이 함께 쓴 <더 많이 공부하면 더 많이 벌게 될까>(개마고원)에서는 프리드먼이 제시한 긍정적인 미래인 ‘평평한 세계’를 ‘기회의 바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지식전쟁은 경쟁을 통해 미국인들의 기량을 더욱 향상시킬 것이고, 가장 뛰어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할 것”이기에 인도와 중국 같은 “신흥국과의 경쟁에 미국의 중산층마저 휘말릴 것이라고 걱정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프리드먼의 가설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기회의 바겐’은 ‘기회의 덫’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책의 원제는 ‘글로벌 옥션’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노동자 고용 시스템”, 즉 “가장 값싼 임금을 제시하는 사람이 고용되는 역경매 시스템”을 말합니다. 미국 기업의 일을 인도나 중국의 노동자가 자국에서 아웃소싱으로 처리하는 세상이 되긴 했습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신흥국의 대졸자들이 고급 노동력을 염가 할인하는 역경매 방식으로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바람에 미국의 대졸자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있으며, 설사 취업을 하더라도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 아래 (미국) 사회는 개인들에게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 빚을 지도록” 권유하고 있지만 이제 그런 구조에서의 승리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옥션’으로 말미암아 관리자급 노동자, 전문직, 기술자들은 일자리 시장에서 입지가 점차 약화되고 있어 “성실하고 능력 있는 노동자들이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은 깨졌다는 것을 저자들은 입증해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로 저자들은 ‘디지털 테일러리즘’을 제시합니다. “자동차·컴퓨터·텔레비전과 같은 제품의 부품을 전 세계에서 나눠서 생산하고 고객의 수요에 맞게 조립·판매하는 방식”이 서비스 업무에도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회계사·교수·엔지니어·변호사·컴퓨터 전문가와 같은 직업도 이제는 더 이상 수입·직업안정성·커리어 전망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오로지 1등만 살아남는 ‘승자독식’ 구조로 빠져들고 있답니다.

한때 유학생 세계 1위를 기록했던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요? 불경기와 중화권 유학생의 증가로 유학생 수는 세계 1위에서 4위로 내려앉았지만 유학생 규모는 18만2300여명으로 여전히 많습니다. 이중 절반가량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졸업 후 현지 취업은 ‘하늘의 별 따기’라 서둘러 귀국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유학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기러기 아빠’가 크게 증가하는 바람에 이들의 고달픈 삶을 조명한 <수상한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어제부터 방영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제 남아도는 고급 인력의 처리가 문제입니다. <잉여사회>(최태섭, 웅진지식하우스)는 도무지 쓸 데를 찾을 수 없는 ‘잉여인간’을 화두로 우리 사회를 명쾌하게 정리해낸 책입니다.

저자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가 취업마저 포기해 ‘사포세대’로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잉여인간들은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인 ‘자기소개서’를 창작하느라 바빠 책을 읽을 시간도 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과거 10명이 할 일을 혼자 떠맡게 된 사람이 과로로 죽어가는 동안, 다른 9명은 손가락을 빨고” 있다가 “누군가가 과로로 쓰러질 때만 나머지 9명 중 1명에게 과로할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니까요.

저자는 잉여의 존재론적 위상은 ‘좀비’와 ‘유령’일 뿐이랍니다. “살아 있음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오늘날 잉여들의 상징이다. 잉여는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도 살지 못한다. 잉여가 세상에 줄 것은 오로지 역설뿐”이라네요. 우리는 언제쯤 이 잔혹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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