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스트리킹, 1974년 봄의 주변부 남성

2013.10.11 19:52 입력 2013.10.11 22:29 수정
권보드래 | 고려대 국문과 교수

저항과 일탈, 그 갈림길에서의 해프닝

■ 가장 약하고도 가장 강한 ‘벗은 몸’

“어디서 용기가 나서 옷을 벗고 싸웠을까.” 정말이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서 속옷까지 다 벗어던지고 경찰에 맞섰을까. 200여명이나 되는 여성 노동자들이. ‘섹시’가 최고의 찬사로 통하는 지금도 옷을 한 꺼풀 벗어버리는 건 겁나는 일이겠거늘, 가부장제가 독했던 1970년대 한복판에 젊은 여자들이 나체가 돼 맞선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1976년 7월25일,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나체 시위는 1970년대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다. 한여름인데다 여러 날 농성 중이었던 끝이라 산더미같이 쌓인 속옷은 하나같이 ‘꼬질꼬질하고 더러’웠다고 한다. 그 속옷더미를 보니 “절로 눈물이 났다”고 시위 참가자들은 후일 회고한다. 그랬을 테다.

벗은 몸은, 가장 약하고 가장 강하다. 아무것도 지닌 것 없으되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한다. 1970년대를 통해 가장 상징적이고 가장 중요한 벗은 몸이라면 응당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몸을 꼽아야 할 터이다. 노동사에 있어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YH 사건과 더불어 박정희 시대의 종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동일방직에서는 나체 시위에 이어 1978년에는 예의 ‘똥물 사건’이 벌어져 여성 노동자의 삶, 그 극한의 억압을 몸 자체를 통해 확인케 해 주었다. “이 쌍년들아, 똥이나 먹어라! 이것이 뭣인 줄 아냐? 바로 개가 먹는 똥이다!” 욕설과 함께 분뇨를 뿌리고 심지어 억지로 입에 분뇨를 밀어넣은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같은 작업장에 근무하던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1974년 미국과 유럽,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주변부 남성’들의 스트리킹이 벌어졌다. 경찰은 음란죄·경범죄를 적용해 처벌에 나섰다. 사진은 일본 히로시마 번화가의 스트리킹(3월14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4년 미국과 유럽,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주변부 남성’들의 스트리킹이 벌어졌다. 경찰은 음란죄·경범죄를 적용해 처벌에 나섰다. 사진은 일본 히로시마 번화가의 스트리킹(3월14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잘 알려져 있듯 19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한 것은 경공업에 종사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남성 노동자의 참여도는 극히 저조했던 것으로 전한다. 동일방직의 경우 보이듯 남성=어용, 여성=민주라는 식의 이분법이 작동하기 쉬운 사례도 드물지 않다. ‘큰오빠’ 전태일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던 남성 노동자들. 1970년대의 여러 사건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불만이 없었을 리 없건만 그것은 정권을 향하는 대신 흔히 주변의 약자를 상대로 배출됐다. 응당 동요와 분열이 있었을 텐데 그 또한 좀체 표면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들의 신체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신체와는 전혀 다른 신체, 예컨대 1974년 한때 유행했던 ‘스트리킹’의 벌거벗은 몸에 가까웠다.

1974년 3월이었다. 1974년이라면 연두에 긴급조치 1호가 발효된 바로 그해다. 광복절 행사 때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격당했던 해이기도 하다. 청년문화논쟁이 신문지상을 달구었던 것도 같은 연도다. 한편에서는 박정희 정권 위기설이 떠돌기 시작했고 각 대학 학생들은 3~4월을 목표로 대규모 시위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그 3월은 주지하다시피 대학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음을 누구나 예감하던 시절이었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실제적 귀결은 4월3일 서울 시내 몇몇 대학에서의 동시적 시위, 그리고 같은 날 발표된 긴급조치 제4호였다.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을 거명하며 반정부 조직 일망타진을 예고했다. 1년여 후에는 긴급조치 7호를 발표해 옛 인혁당 관계자들을 한꺼번에 사형대로 보낸다. 1974~1975년 벌어진 일련의 정황은 박정희 정권이 국내외적 고립을 감수하고 비판 세력을 ‘소탕’할 태세에 들어갔음을 알려준다. 1975년 봄, 대학가에서 산발적 시위가 있었지만 주동자 제적에 휴교령이 잇따르면서 그나마 잠잠해졌다. 대한민국의 일상은 그야말로 ‘얼어붙었다.’ 갑남을녀들마저 공포를 일상적으로 체감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던 듯하다.

스트리킹은 권력과 반권력 사이 긴장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 찾아들었던 해프닝이다. 처음 소식이 전해진 것은 ‘뭔가 일어날 거라는’ 예감으로 가득 차 있던 1974년 이른 봄. 3월 초 여러 신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국에 ‘나체 질주’가 유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미국, 대학, 나체. 한두 단짜리 가십성 기사로나마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단어들이었다. 세계적 격변의 한복판이었다. ‘1968’로 상징되는 대규모 시위는 사그라졌지만 익숙한 옛 세계는 이미 사라져 버린 후였다. 1973년에는 마침내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고, 그 전후 뮌헨 올림픽 테러(1972), 칠레 쿠데타(1973), 중동 위기(1973) 같은 사건이 잇따랐다.

미국에서 스트리킹이라는 희한한 퍼포먼스가 출현한 것은 1973년 초였다. 원인도 명분도 분명치 않은 채 이 퍼포먼스는 1년여 미 전역 캠퍼스를 휩쓸었다. 규모도 커졌다. 처음엔 단독으로 달리던 것이 1973년 중반부터는 ‘단체 질주’가 유행하기 시작, 메릴랜드 대학에서는 533명의 학생들이 나체로 거리를 뛰었고 조지아 대학에서는 1543명의 학생들이 벌거벗은 채 시내를 가로질렀다. 가끔 닉슨 대통령 탄핵 같은 정치적 의제를 결합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미국 대학생들에게 스트리킹은 그저 재미, 일회성 해소였던 것 같다. 스트리킹(streaking)의 원뜻이 말해주듯 그 전형적 행동 양식은 ‘질주’였다. 위반, 일탈, 저항, 질주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마침표.

‘스트리킹 서울 상륙’이란 제목의 20대 청년의 알몸 질주(3월14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스트리킹 서울 상륙’이란 제목의 20대 청년의 알몸 질주(3월14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예술과 저항, 문화와 범죄의 사이

한국에 최초로 스트리커가 등장한 것은 1974년 3월13일이다. 3월이지만 추워서 아침엔 영하 7도까지 내려가는 날씨였다 한다. 오전 8시를 좀 넘긴 출근길, 고려대 앞 안암동 차도 한복판에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뛰어들었다. 뒤에선 친구인 듯 보이는 두 청년이, 한 명은 옷을 들고 한 명은 카메라를 겨냥한 채 따르고 있었단다. 청년은 200여m 되는 거리를 달리다 주유소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외국의 스트리킹에 대한 신문 보도가 시작된 지 고작 일주일 남짓 됐을 때의 일이다.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 앞 차도에 출현한 것으로 보아 학생이었거나, 적어도 학생으로 보이고자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카메라를 들었던 것으로 보아 젊은 예술가들이 벌이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튿날 경향신문에서는 다른 사정은 불문에 부친 채 “스트리킹이라는 광태가 급기야 서울 거리에 출현하고 말았다. 참으로 통곡할 일이다”라고 썼다. 같은 날 일본에도 최초의 스트리커가 등장했다. 히로시마 시내를 질주한 이 스트리커는 맨몸인 채 헬멧을 쓰고 망치를 들고, 등에는 탄원한다는 뜻의 ‘강소(强訴)’란 글자를 크게 써 넣었다.

3월15일에는 전국적으로 세 군데서 스트리킹 사건이 있었다. 미군들이 벌인 해프닝을 예외로 하면, 서울 한남동에서는 20대로 보이는 장발 청년이 알몸으로 도로를 질주했고 충무에서는 27세의 구두닦이 청년이 충무극장에서 통영여고까지 시내 한복판을 달렸다. 후자의 경우는 현장에서 체포당해 구류 7일 처분에 처해졌다. 17일 밤에는 금호동에서 20대 인쇄공이 스트리킹을 하려 옷을 벗다가 체포됐다. 스트리킹을 하면 2차를 사겠다는 말에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었다고 한다. 이튿날 경찰청에서는 스트리킹에 대한 처벌을 강화, 공공장소에서의 음란행위죄를 적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즈음 전국적으로 다시 장발 단속령이 내렸는데 그것도 스트리킹 유행 때문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안암동 스트리커를 체포하기 위해 전담 수사반까지 편성됐다.

전국을 휩쓸 기세였던 스트리킹은 그러나 이후 신문 지면에서 사라진다. 연말의 회고를 참조하면 주요 신문사들이 보도 자제에 합의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마 여러 건의 스트리킹이 더 있었겠지만 “신문보도가 중지되자 스트리킹도 중지”됐다. 확인할 수 없지만 보도되지 않은 스트리킹 사건들도 20대, 남성, 구두닦이나 인쇄공 같은 직업을 가진 이가 벌인 일이었기 쉽다. 대학생이 중심이 된 해외 유행과는 달랐던 셈이다.충무에서의 27세 인쇄공은 스트리킹 막판에 통영여고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스트리커가 속칭 ‘바바리맨’과 달라 보이지 않는 지점이다. 외국에서도 스트리커들은 주로 백인 남성이었다. 한국에서는 사회적, 문화적인 파장도 크지 않았다. ‘스트리킹 시대의 청년문화’라는 선전문구를 내건 영화가 등장했으나 별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당대의 인기 작가 최인호가 <바보들의 행진> 말미에 ‘병태의 스트리킹’이란 장을 할애했으나 그마저 옷 입은 채 달리는 “토착화된 스트리킹”에 그쳤다.

치안국의 형사처벌 방침을 다룬 경향신문의 보도(3월18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치안국의 형사처벌 방침을 다룬 경향신문의 보도(3월18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부조리한 체제에 ‘반기’를 들다

이른바 ‘도시 하층 남성’. 이들은 ‘선데이 서울’의 주요 독자층이었고 호스티스 문화의 광범한 저변이었던 한편 광주대단지 사건과 부마항쟁에서 저항의 도화선이 된 집단이었다. 1974년 봄, ‘질주’가 상징하듯 불만은 최고에 이르렀고 궐기는 산발적으로나마 출현하기 직전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학생과 지식인들의 저항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두 흐름은 막 조우할 찰나였다. 일상생활에서의 불만이 익을 대로 익고, 그런 불만이 ‘이름’을 갈망하게 될 때, 그리고 먼저 절망하고 먼저 궐기했던 이들이 지은 ‘이름’을 대중이 허락할 때. 봉기는 그런 순간 일어난다는 것을 역사는 되풀이해서 보여준다.

개발의 열매를 서민에게 돌리겠다는 약속을 믿는 사람은 점점 드물어졌다. 박영복 대출사기 사건이 보여주듯 정부는 재벌에 한없이 관대했고, 연탄 파동이 보여주듯 서민들은 실패한 정책의 결과를 짐 진 채 허덕여야 했다. 주변부일수록 고통은 더 심했다. 스트리킹 사건의 주역들은 바로 이 주변부의 삶에 위치한 이들이었다. 동일방직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부은 것도 아마 이들이었을 터다. 폭력으로써 여성 위에 군림했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막막한 삶 앞에 허세는 사라졌다. 체제는 결코 그들 편이 아니었다. 폭발하듯 질주하여 체제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저 너머에서 꿈틀거렸다. 자기와 똑같이 보잘것없는 이들과 손잡고 싶은 마음도 솟아나지 않았을까.

한국의 스트리킹은 바로 그 사이, 갈림길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다. 덜렁거리는 신체를 과시함으로써 한순간 뭇사람을 놀라게 하고 끝날 것인가, 혹은 온 힘으로 질주해 경계를 넘어설 것인가. 긴급조치가 잇따라 발동된 1974~1975년의 정국 앞에 이 동요는 움츠러들었다. 정권의 선전포고 앞에 도시 하층 남성 주체는 다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정권의 골칫덩이’이자 ‘말단 하수인’이라는 이중의 위치로 돌아간 듯 보인다. 이들의 얼굴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에 이르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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