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시인 안도현

2014.04.25 18:29 입력 2014.05.02 22:04 수정
글 백가흠 소설가·사진 백다흠 은행나무 편집자

문학이란 게 뭐겠어, 짜장면이나 같이 먹는 거지

“어떻게 지냈어? 네가 글을 쓸 줄은 몰랐다.”

우리는 별말 없이 오래도록 자작나무 사이를 오가는 가을바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이리중학교에 다닐 때 국어선생님이었다. 그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었다. 가끔 백일장을 따라다녔는데 그는 우리들을 인솔하는 젊은 선생이었다. 그저 하루 땡땡이를 친다는 것에 들뜬 중학생 시절이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까. 소나무 그늘에서 신문지를 얼굴에 덮고 낮잠을 청하는 그의 모습이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백일장 와서 농땡이 친 게 들킬까 봐 우리들은 눈치를 보곤 했는데, 그는 다른 선생들과는 좀 달랐다. “뭘 좀 썼어? 대충 마무리하고 짜장면 먹으러 가자.” 백일장이 끝나면 그는 우리에게 짜장면을 사줬다. 우리를 바라보던 다른 학교 친구들의 부러워하던 눈빛이 이십 년이 훌쩍 넘었어도 선하다. “문학이란 게 뭐 있어? 짜장면이나 같이 먹는 거지.” 그가 앞장서며 중얼거렸던가. 선생에겐 선생질도 배우는지라 나도 가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같은 말을 하며 짜장면을 돌리곤 한다.

[백(白)형제의 문인보](6) 시인 안도현

그는 소년 같았다. 작고 마른 몸, 두꺼운 뿔테가 무거워 보일 만큼 희고 작은 얼굴의 그였다.

“이제 형이라고 불러라.”

“…제가 어떻게 그래요, 선생님.”

그도 그럴 것이 우리를 가르치던 때 스물일곱이었다고 했다. 나하고는 열세 살 차이가 났다. 그가 스물아홉이던 1989년,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이리중학교에서 해임되었다. 중3. 그 사건은 내게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나는 글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부터 세상 바라보는 심사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가 가르치던 세 개 반 학생들이 수업거부를 모의하고 있었는데 우리 반은 그가 담당교사는 아니었지만 동참했다. 내가 반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 원래 반장들끼리는 친하지 않던가. 성환, 성훈, 창호 셋이 주범들이고 나는 그저 그때도 오지랖이 넓은 중학생이었던 것뿐이다.

햇빛 짱짱하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말 없이 번호 순으로 줄 맞추어 뙤약볕에 앉아있었다. 3학년 네 개 반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안도현 선생을 돌려달라고 데모를 했다. 1989년의 일이니 25년 전이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키 작은 학생을 교장 선생님이 일으켜 세우자 말없이 맨 뒤로 가서 다시 앉았다. 반복해서 그러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교문 앞까지 가게 되었다. 그 일은 지금 생각해도 꽤 근사한 일이다. 이후 나도 주동자로 지목되어 당시 교감 선생님이 자전거로 집까지 한동안 데려다주었던 기억이 난다. 전교조 사무실에 들락거릴까 그랬던 것인데 순전히 그것은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된 선생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뵈러 노조 사무실로 놀러갔던 기억은 있다. 그곳에서 민중가요를 처음 배웠다. 해직된 선생들은 복직하지 못했고 시간이 꽤 흘렀다. 후에 대학에 가서 나는 노래패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동창들은 하나의 사건이나 추억으로 그를 기억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문학을 전공하는 내게 그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과 발표하는 시를 빼놓지 않고 읽었다. 인연이 감사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가 장수의 한 고등학교에 복직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짠한 마음 가누기 힘들어 혼자 소주를 홀짝거렸다. 가난한 그가 이제 좀 잘 살았으면 하고 바랐더랬다. 고등학생이 되고 스승의 날 즈음, 으레 선생님께 선물하던 손수건이나 넥타이 같은 것은 관두고 돈을 모아 라면박스를 들고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고향을 떠났고, 그는 내 고향에 남아 삼심 년 넘게 살았다. “가흠아, 멀리 있니? 부탁이 있는데 문자 보면 힘들더라도 전화주렴.” 그가 보낸 메일을 나는 그리스에서 받아보았다.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게 사람인가. 데뷔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그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강의는 핑계고 너랑 막걸리 먹고 놀고 싶어 그러는 거야.”

우석대로 자리를 옮긴 그가 강의를 부탁했다. 일주일에 한번 고향에 내려갔다. 안도현 선생뿐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보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사람다운 구실을 한 드문 해가 되었다.

[백(白)형제의 문인보](6) 시인 안도현

옆에서 보니 그는 너무 바쁜 사람이었다. 전주에서 유명인사이기도 해서 그랬지만 수많은 동료, 선배, 후배 문인을 챙기기 바빴고, 학생들과 막걸리 잔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가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의 몸은 분명 ‘시의 우주’임이 확실했다.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몸에 별처럼 시가 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인 김민정, 다흠과 둘이 만드는 잡지에서 인터뷰를 한다기에 따라갔다가 죄스러운 밤을 만난 적이 있다. 다른 안도현들과 조우했기 때문. 중3 담임이었던 김춘영 선생님을 비롯해 신동범, 송창우, 박태호 선생님, 이리중학교 은사들이 막걸리집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뭔가 죄스러워 빠르게 취했다. 젊었던 그들은 이제 정년을 하거나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씁쓸하고 쓸쓸했다. 안도현 선생과는 3년 남짓 함께 근무했는데 25년 넘게 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좀 신기하기만 했다. “나 해직되고 한동안은 이 형님들이 월급 쪼개서 먹여살려줬어.” 나는 잊고 있었다. 우리 선생님들은 그냥 선생이 아니었던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내가 왜 글을 쓰는가. 필연적인 이유는 그들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막걸리 열한 주전자를 비웠다. 어떻게든 내가 막걸리 값을 치르려 했으나 선생님들에게 혼만 나고 말았다.

그런데 막걸리집에는 안도현 선생이 마련한 술자리가 서너 테이블 더 있었다. 그는 부지런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쉴 새 없었다. 전주 동료문인 모임, 과거 동료선생 모임, 해직교사 모임, 인터뷰하러 온 기자 등등.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아무도 만날 수가 없어.” 하지만 그를 만나러 온 누구 하나 서운해 하는 사람 없었다. 테이블에 그가 돌아오면 밀린 얘기와 막걸리를 나누었다. 모두에게 나눌 만큼 정은 그득했다. 사람들의 말로 그는 수십년간 변함없이 사람들을 챙겼으며 허투루 관계를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아무도 잃은 적 없었다. 바빠도 그처럼 챙기며 살아야 할 텐데. 바람뿐이다. 스승만한 제자 없다는 말. 봄빛 다 저물기 전에 전주에 내려가 소박한 내 안도현들을 모시고 막걸리 잔 나누고 싶은 봄밤이다.

▲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돼 등단했다. 대학 졸업 후 전북 익산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인 1985년 첫 번째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지 5년 만에 복직돼 전북 장수 산서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전업작가 시절을 거쳐 2004년부터 전주 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모닥불>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등 10여권의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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