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존재 방식

2014.05.02 20:45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보들레르는 ‘너그러운 노름꾼’이라는 기이한 산문시를 썼다. 시인이 마귀들의 왕인 사탄을 만난 이야기다. 마음씨 좋은 늙은 귀족의 풍모를 지닌 마왕은 온갖 지식에 통달한 존재이며, 특히 인문학에 이르러서는 그 체계 하나하나가 어떻게 성립되어 어떻게 발전했는지 꿰뚫어 알고 있다. 이런 사탄도 단 한번뿐이긴 하지만 간담이 서늘한 적이 있다. 어느 예리한 설교자가 “악마의 가장 교묘한 술책은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말했을 때였다. 이 말은 악이 늘 평범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온갖 미명을 동원하여 받들고 있는 제도와 관습 속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악마의 존재 방식

그러나 저 “악마의 교묘한 술책”을 은유로만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부지런한 보들레르 연구자이며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전문가인 막스 밀레르는 1960년 <프랑스 문학에 나타난 악마>라는 책을 출간했다. 상·하권을 합해 1000쪽 가까이 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그 연구의 동기가 제2차 세계대전의 참극에서 시작되었다고 쓴다. 그 끔찍한 집단적 범죄, 인간 행위의 일반적 척도를 넘어서는 악독한 힘의 폭발이 오직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인간의 내부에는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을 망라해서 어떤 알 수 없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준비된 악덕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바로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문학의 주제가 되어 온 악마의 존재를 다시 검토하게 했다고 말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악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무력감이 그 거대한 책을 쓰게 한 것이다.

이 거대한 무력감을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다시 느끼고 있다. 수많은 생령,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300명이 넘는 생명들이 물속에서 숨졌거나 실종했음을 알게 된 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도 끝도 없는, 그래서 설명할 길이 없는 악 속에 침몰해 있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막스 밀레르가 생각해 본 것처럼, 이 침몰이 정말 악마의 책동에 의한 것이라면 악마는 이 참극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악마는 먼저 우리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다.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만 이야기하자. 그것이 2009년이던가, 한겨울에 용산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망루에서 불에 타 숨졌을 때 사람들은 한동안 애통해 하였지만 끝내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같은 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일자리를 잃은 2000여명 쌍용차 노동자들 가운데 스물다섯 명이 비통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는 내내 막장드라마를 보며 세상이 평화롭다고 믿으려 했고, 도시정비니 고용유연성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아름다운 말들을 악마는 아무 데나 내걸었다.

악마는 용의주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쳤고 여전히 아우성을 치건만, 저 위험한 배를 비정규직들이 몰아도 그것을 예삿일로 여기도록 끝내 세상을 훈련시켰다. 악마는 제 시선을 벗어난 사람들이 그 몰상식을 고발하더라도 그들을 ‘종북빨갱이’로 몰도록 프로그램된 사람들을 높은 자리, 낮은 자리에 뿌려 놓았다. 악마의 친화성도 한몫을 했다. 기우뚱거리는 배에 수많은 사람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내는 회사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이 상을 주었다. 감시해야 할 사람들과 또 그것을 감시해야 할 사람들을 악마가 차례차례 포섭한 것이다.

악마는 섬세하기도 했다. 기울어진 배를 물살이 그렇게 세다는 맹골수로까지 몰고 가게 했다. 그 위급한 시간에 크게 활약해야 할 사람들이 딴짓을 하게 만든 것도 악마의 셈에 들어 있다. 제 이름으로건 남의 이름으로건 그 회사를 설립하고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훑어내어 회사를 빈껍데기로 만든 사람에게 예술가라는 직함을 붙여주기도 했다. 악마는 눈 뜨고 그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는 순간에도 우왕좌왕할 정부를 기다려 배를 침몰시켰다. 아이들을 다 구했다는 유언비어를 책임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뜨리기도 했다. 악마는 빠뜨린 것이 없었다.

물론 나는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만이 저지를 일을 이 땅의 사람들이 저질렀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악마의 처사였다면 악마의 연구로 끝날 텐데, 그것이 우리의 죄이니 우리는 이제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 내 자신을 용서하지 말고 리본을 달건 촛불을 들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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