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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펴낸 우에노 지즈코 e메일 인터뷰

2014.07.18 20:38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우에노 지즈코 지음·이선이 옮김 |현실문화 | 327쪽 | 1만8000원

광복절을 하루 앞둔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1990년 6월 일본 정부 관계자가 “일본군은 군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 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실명 증언은 국내에서도 처음이었다. 1991년 12월 김 할머니는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일본 여성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는 독일에 머물다 이 보도를 접했다. 같은 패전국이면서 독일과 일본의 전후 처리가 너무도 다른 원인을 줄곧 생각하던 그는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에게 평생의 숙제가 됐다.

ⓒ스미토모 가즈토시

ⓒ스미토모 가즈토시

이 책은 1998년 일본에서 출간된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대폭 개정하고 증보한 2012년판의 한국어판이다. 1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하는 핵심인 국민국가와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개정증보판에서는 소폭 개정됐다. 2부와 3부가 추가되었고 3부는 일본 지식인들과 벌인 논쟁에 대한 답변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국가가 범한 전쟁범죄에 관해 여성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끈질기게 찾았다. 그는 일본 정부가 전쟁 초기부터 ‘후방’에 있는 여성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여성의 조직화를 추진했으며 전시 여성은 전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권익 신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반성적 여성사 흐름에 대해 비판하며 국민사를 초월하기 위해 젠더란 범주를 내세워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일본의 한 사회 교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학급 토론을 진행하면서 반 전체 학생들에게 같은 반 친구인 재일 한국인 여학생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는 일화를 예로 든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재일 한국인 여학생은 곤혹스러워했다. 개인과 국민국가를 동일시하는 함정에 대한 얘기다.

[책과 삶]‘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펴낸 우에노 지즈코 e메일 인터뷰

물론 저자의 기본 논지는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으로 일본의 태도를 ‘삼중의 범죄’라고 표현한다. “첫째 전시 강간이라는 범죄와 둘째 전후 반세기 동안 그 죄를 망각했다는 범죄를 말한다. 거기에 덧붙여 현재 보수파 사람들이 피해 여성의 고발을 부인하고 있는 것을 세번째 범죄라고 불러도 좋다.” 저자는 1995년 일본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만든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도 신랄하게 비판한다. 국민기금의 공적 성격이 애매하기 때문에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고, 국가 보상을 하지 않기 위한 구실로 쓰일 우려가 크며, ‘국민 전체의 책임’이라는 말에서 다시 한 번 ‘1억인 총 참회’라는 무책임 체제가 재생산된다는 세 가지 이유로 들었다.

저자는 피해자의 요구인 공적 사죄, 국가에 의한 배상에 응해야 하고 이를 위해 ‘전후보상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히 정부의 책임만을 추궁하지 않는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투표자’로서 정책 결정자들에게 위탁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잘못하는 데 반대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대면했던 1993년 도쿄대 조교수였던 저자는 2011년 명예교수가 됐다. 비영리법인 ‘여성행동네트워크’를 설립해 위안부 문제를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루고 있다. 저자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번역은 정하민씨가 맡았다.

[책과 삶]‘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펴낸 우에노 지즈코 e메일 인터뷰

-아베 신조 총리는 고노담화를 부정했고 위안부 문제는 더 후퇴했다. 일본 정부의 태도를 어떻게 보는가.

“한마디로 ‘짜증스럽다’고 답할 수 있겠다. 역사상 잘못을 저지르고 전후 처리 과정에서 오류를 더한 데다 위안부 문제의 대응에서도 잘못을 반복했다. 간신히 화해의 길로 향하는 듯한 순간에 보수 정치가의 본심이 드러나면서 겨우 일궈낸 성과를 무너뜨렸다. 고노 요헤이 전 장관이 최근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권을 바꾸라’는 말까지 했다.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아베 정권의 폭주에 위험을 느끼는 일본인들이 늘어간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은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실패하지 않았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

“국민기금이 실패한 건 피해자 여성들의 요구와 다른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국민기금의 오류는 선의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의도가 아닌 결과로 판단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의가 범한 잘못을 우리는 반성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 국민기금이 설립된 1995년에는 일본 전후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 당수가 내각수반이 되는 드문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국민기금의 담당자들은 그런 상황이 ‘설사 불충분할지라도 국민기금 같은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의 판단은 이후의 역사에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고 말았다. 1995년 이후 일본 정치는 줄곧 우경화해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국민기금 같은 제도를 만드는 일은 1995년보다 더 어려워졌다.”

-여전히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민족 문제로 과잉 담론화되고 있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운동을 일으킬 때 ‘민족’이라는 키워드가 강력한 담론적 자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키워드를 일단 사용하게 되면 생겨나는 공과 과를 모두 꿰뚫어봐야만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국가’나 ‘민족’이 영유해서는 안된다.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일은 한국인이 민족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과 별개의 일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피해자들을 위한 일인지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을 처음 발간한 이후 한국에서 ‘제국의 페미니스트가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2011년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내셔널리즘 비판과 전후 책임 회피의 뒤집어진 결합’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에 동조하는 ‘제국의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여부는 책을 보고 직접 판단해 주기 바란다. 나는 일본인의 전후 책임을 부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본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전후 및 현재의 일본 정치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이 국가나 민족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1991년 처음으로 실명 증언했던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사망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듣고 싶다. 현재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234명 중 생존자는 54명뿐이고 대부분 고령이다. 여전히 일본의 사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김학순 할머니 생존 시 고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1991년보다 일본 정치 상황이 우경화되었으며 그런 움직임을 막을 힘이 없는 무력함이 분할 뿐이다.”

-식민지 시기의 범죄에 직접 연루되지 않은 일본인들의 반성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반대로 식민지 피해를 직접 입지 않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어떤 사과를 요구해야 할까.

“누구도 피해자를 대리, 표상할 수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전후에 태어난 일본인과 한국인에게는 과거를 둘러싼 대리전쟁이 아니라 현재의 한·일 관계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의 책임이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와 미래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부모 세대에 불행한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아이들의 세대는 전혀 다른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면 하는가.

“일본 정부는 북한의 납치 피해자를 일본 내셔널리즘을 위해 이용했다. 위안부 문제 또한 한국 정부에 의해 내셔널리즘을 위한 자원으로 동원되고 있다. 내셔널리즘은 ‘우리’와 ‘그들’을 대립시키는 사상이다. ‘피해자들에게 공감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민족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다시금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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