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최순실 실세설…아니 땐 굴뚝의 연기?

2014.12.06 14:49

“박 대통령 가족은 최태민ㆍ정ㆍ최씨뿐” “모두 소설일 뿐” 떠도는 설 많지만 확인하기 쉽지 않아 의혹 눈덩이
‘숨은 실세 정윤회’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자는 정윤회 막후 실세 논란을 지난 수년간 취재해 왔다. 정씨와 가족 명의의 강남 부동산에도 가봤다. 강원도 평창에 그가 지난 2005년 부인 및 딸과 공동소유로 구입한 목장지도 현지 취재를 통해 탐문해봤다. 논란은 간헐적으로 외부에 드러났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였다. 2013년 2월 박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날, 인터넷 매체를 통해 그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조웅 목사가 구속됐다. 비방의 핵심도 정윤회였다.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조 목사의 인터뷰 영상은 현재 블라인드 처리가 되어 있다. 해당 URL로 접속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Warning 메시지’가 뜬다. 아예 한국 내에서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영상을 볼 수도 없다. 친북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의 유튜브 영상도 블라인드 처리가 안 되어 있는 것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며 과도한 대응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누가 방심위에 차단 요청을 했을까. 방심위 관계자는 “명예훼손 관련 정보는 비공개”라고 밝혔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국회 답변에서 시작된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의 7시간’ 논란에서 다시 정윤회의 이름이 나왔다. 검찰 수사를 통해 정씨가 당일 만난 사람이 박 대통령이 아니라 역술인이었다는 것도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정씨가 만난 역술인 이세민씨는 “자신이 박 대통령과 수시로 통화하는 사이이며, 정윤회씨는 자신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고 과시했다. 이씨는 정씨와 자신이 이어지게 된 계기가 지난 1998년 당시 정치에 입문한 박근혜 후보의 출마지를 어디로 하면 좋겠느냐고 정씨가 문의를 해 와서 “대구시 달성군으로 변경하라”고 조언해준 데서부터라고 주장했다.

정씨 ‘독 유학설’ 아리송, 한때 개명설도

이번 사태로 언론에 전면 등장한 정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간 의혹의 대상이었던 자신의 인적사항을 밝혔다. “보인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은 좋지 않은 데를 다녔다. 경희대에서 관광경영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등기부등본 등에 적혀 있는 그의 주민등록상 생년은 1955년이다. 보인상고 졸업연도(30회)는 1974년도이기 때문에 1955년을 기준으로 하면 19살 때다. 대한항공에 보안승무원으로 입사한 것이 1981년도(26살)이므로 7년 사이에 대학과 군대를 다녀온 셈이 된다. 정씨의 대한항공 퇴사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1993년 3월에 받은 정씨의 경희대 석사논문의 제목은 ‘여행사 경영조직 발전에 관한 연구’다. 논문의 구성이나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대학원이 아니라 전형적인 경영대학원 논문이다.

대선 전 정씨가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도를 토대로 2011년과 2012년, 기자는 정씨와 비슷한 연배에 독일 유학을 다녀온 학자군을 여럿 접촉해 문의했지만 ‘독일 유학생 정윤회’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물밑에서 이어 떠올랐던 것은 개명설(說)이었다. 정윤회씨의 원래 이름은 정윤희였는데 ‘영화배우와 이름이 같고 여자 이름 같아서’ 개명했다는 소문이다. 실제 정씨 석사논문의 일부 서지는 정윤회가 아니라 ‘정윤희’라는 이름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을 마친 후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 허태열 당시 비서실장, 박흥렬 경호실장 등과 함께 본관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을 마친 후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 허태열 당시 비서실장, 박흥렬 경호실장 등과 함께 본관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에 독일을 오가면서 사업을 했다는 것은 알지만, 정씨가 워낙 과묵한 편이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정씨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과거 정씨와 함께 박 대표를 보좌하며 2년 넘게 공보담당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같이 일하면서 어느 학교 출신이냐고 꼬치꼬치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 지나가면서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추론하는 정도였다.”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당대표를 맡던 시절, 정윤회 비서실장과의 술자리에 참석했던 한 언론계 인사는 “정윤회와 어울리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강남의 노래방에 갔다. 비용은 누가 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당시에는 최고급 시설이었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자리에 정씨와 4~5명의 지인들이 있었는데 다 팝송 아니면 일본 노래를 불렀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인사는 실제 박근혜 의원실에서 정씨가 하는 역할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했다.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 대통령도 대표 시절이라 의원실에는 잘 나타나지 않았고, (정윤회 비서실장의) 책상 위를 보면 일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바깥에 따로 팀이 있는 모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앞의 인사는 “같이 술집에 가거나 밥을 먹으러 갈 때 계산은 꼭 정윤회씨가 했다”고 기억했다. “원래 개인 재산이 있던 사람 아닌가. 당시 관계는 정확히 몰랐지만 최태민의 유산이 있지 않았겠나. 강남에 빌딩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는 “정씨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가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내가 있는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박 대표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여러 조언을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박 대표도 조언을 많이 듣는 편이었고…. 공부한 수준은 몰랐지만 머리가 상당히 잘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논란이 되는 이재만이나 안봉근, 정호성 등도 그를 따랐고,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2002년 방북 후 판문점으로 귀국하는 박근혜 당시 미래연합 대표를 마중 나온 정윤회 당시 비서실장. YTN화면 캡처

지난 2002년 방북 후 판문점으로 귀국하는 박근혜 당시 미래연합 대표를 마중 나온 정윤회 당시 비서실장. YTN화면 캡처

최씨, 대통령 옷과 똑같은 옷 입고 다녀

일부 과거 보도와 달리 정씨가 얀슨커피숍을 연 것은 1991년 9월이다. 장소도 청담동이었다. 커피숍에서는 제과제빵 시설을 직접 갖추고 ‘독일풍’의 빵과 케이크를 팔았다. 대한항공 승무원 시절 독일을 오가면서 사업아이템을 구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얀슨은 1994년 6월 주식회사로 등기되었다.

역시 최태민 목사의 비서 출신이라는 보도가 있으나 이 역시 확인되진 않는다. 최태민 목사는 1994년 사망했다. 정씨는 1995년 최씨의 다섯째 딸 최순실씨와 결혼하고 이듬해 딸 유연씨를 낳는다.(최씨의 결혼이 재혼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올해 이혼한 것으로 되어 있는 최씨와의 관계에 대해 정씨는 <한겨레>와 12월 2일 전화인터뷰에서 “최씨가 개명(최서연)한 사실도 얼마 전에 알았다”고 말했다. 화제가 되었던 “결혼생활 중 있던 일에 대해 함구한다”는 조건과 관련해서 그는 “이혼 조정 결과에 백이면 백 다 들어가는 조건이며, 나도 변호사에게 물어봤더니 기본적으로 다 들어가는 문구라고 하더라”고 답했다.

12월 4일 최씨와 관련한 특이한 보도가 있었다. 고발뉴스는 “박근혜 대통령의 평소 옷을 최씨가 골라줬으며 대통령 취임식 날 입고 오른 한복도 최순실씨가 선택해 청와대에 반입한 것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정윤회 관계보다 더 주목해봐야 하는 것이 박 대통령과 부인 최씨의 관계라는 것이다. 딸 승마와 관련, 박 대통령이 직접 문화체육관광부 실무자를 문책한 것에 전 부인이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정씨는 “내가 관여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최씨가 관련되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대통령의 패션에 최씨가 관여되어 있다”는 ‘풍문’이 관련 업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것은 확인된다. 한 인사의 전언.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최순실을 아는 주변에서 ‘어떻게 자신이 입고 다녔던 것과 똑같이 옷을 만들어 주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단적으로 ‘저도의 추억’ 사진 때 입고 나온 옷과 목 칼라까지 똑같은 옷을 (최순실이) 전에 입고 다녔다는 것이다. 정윤회씨와 그런 남녀 사이라면 왜 그 전 부인과 박 대통령이 옷을 똑같이 입느냐, ‘박 대통령이 (최씨의) 아바타냐’라는 말이 나왔다.”

최씨 소유의 부동산 의혹 등은 그동안 간간이 제기된 적이 있지만 최씨 경력에 대한 보도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최씨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1978년 최씨는 구국여성봉사단 산하 새마음대학생 연합회 회장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이듬해 6월에는 이런 기사도 있다. “‘새마음 제전’은 이날 상오 10시 20분 최순실(단국대 대학원 1년)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 상오 10시30분 예고없이 박 총재가 식장에 들어서자 젊은 학생들은 ‘새마음’이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으며 박 총재는 손을 흔들어 이들의 환호에 답했다. …(후략)” 박 총재는 박정희 대통령의 ‘큰 영애’인 박근혜 현 대통령이다. 당시 언론에서 최순실씨가 구국봉사단의 전 총재 최태민의 딸이라는 것은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명예총재는 최씨 부녀 관계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씨의 이름이 다시 언론지상에 등장하는 것은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당시 육영재단 직원들은 최태민과 최순실의 전횡을 비판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데모를 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박지만씨가 2011년 8월 1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37주기 고(故)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 정지윤 기자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박지만씨가 2011년 8월 1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제37주기 고(故) 육영수 여사 추도식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 정지윤 기자

<주간경향>이 확인해본 결과 최순실씨는 1975년 단국대 영어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원도 영어영문학과로 진학을 했지만 수료만 한 상태로 확인됐다. 최씨는 1986년 3월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육영재단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최태민의 여동생으로 알려진 여군 출신의 최○○ 소령이 예편을 하자마자 유아교실 과장으로 취임하면서 많은 물의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지만씨·근령씨 쪽과 알력 다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근혜 이사장 시절 하루가 멀다하고 윗사람이 바뀌는데 공통적으로 최씨가 많았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을 방패 삼아 최씨 일가가 육영재단 재산을 가로채고 있다”는 지만씨·근령씨 쪽과 박근혜 이사장 사이에 다툼이 태동하던 시기다.

최순실씨는 이후 강남 압구정동에 초이유치원을 개설한다. 인상적인 것은 유치원 부설로 ‘민’ 국제영재교육연구원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육영재단 유치원장을 맡으면서 최씨의 관심은 유아교육, 특히 영재교육 쪽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아교육과 관련한 단행본과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특이한 것은 논문의 발행처. 그가 다른 저자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사회문화적 환경요인에 따른 아동의 격차연구 : 인지발달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한국문화재단연구소에서 1989년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문화재단은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오랫동안 이사직을 유지해온 재단으로 논란이 되었던 곳이다. 최씨와 같이 다른 논문을 쓴 것으로 되어 있는 모 교수는 <주간경향>에 “논문에 최씨의 이름이 앞에 게재된 것은 당시 영재교육과 관련한 연구를 하면서 최씨가 1990년대 초·중반 운영하던 ‘초이유치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민’ 국제영재교육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있던 그는 “당시에는 육영재단 관련이나 최씨 아버지와 관련된 일을 한두 사람을 제외하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며 “남편(정윤회)은 독일을 오가며 무역업을 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최씨가 “유치원 사업이 잘 돼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고 답한 것은 일부분은 사실로 보인다. 앞의 교수는 “당시까지는 유아영재 프로그램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초이유치원에 우수한 자녀를 보내려는 부모들이 많이 몰렸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의 전 육영재단 관계자는 “육영재단이나 박 이사장 주위에서 최씨 일가가 축재한 부가 바탕이 되지 않았겠느냐”고 덧붙였다. 최씨의 뒤를 이어 연구소 원장이 된 이영석 전 성균관대 교수(현 사단법인 KMS 이사장, ㈜아가월드 교육원장)의 경력에도 육영재단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KMS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그의 경력은 한국육영재단 상임고문, 한국문화재단 이사, 한국교육복지포럼 대표다. 청와대 안팎에는 “문고리 3인방은 생살이고 최순실은 오장육부다. 생살은 피가 나도 도려낼 수 있지만, 오장육부에는 목숨이 달려 있다”는 말이 퍼져 있다고 한다. 무슨 의미일까.

박 대통령 측 “국정개입 의혹 다 픽션”

지난 2007년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측 박근혜 후보 검증팀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한 최측근 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박근혜에게 박지만은 가족이 아니라 애물단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최태민과 최순실, 정윤회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 이 인사는 “우리가 확보한 증언이나 자료 내용은 너무나 쇼킹한 내용이라서 당시엔 MB까지 보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기록은 남겨뒀다”고 말했다. 기자가 사석 참석자를 통해 확보한 이 인사의 ‘증언 내용’은 지금까지 알려진 박 대통령 주변 이야기와 너무도 다른 부분이 많고, 또 검증하기도 사실상 어려운 이야기다.

‘정윤회 비선’은 정말로 존재했던 것일까. 지난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정에 박근혜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가 1년이 지난 시점에 작성한 글 중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혹시 이재만, 이춘상, 정호성(이상 수석보좌관 및 보좌관)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안봉근, 정윤회(이상 수행보좌관 및 삼성동 캠프 실세) 두 분을 아시는 분이 있습니까?…(중략)…제가 박근혜 캠프에 몸 담고 있던 시절 앞서 언급한 최측근 보좌진들이 박근령씨와 신동욱씨에 대해 대책회의를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불과 수개월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안에 해당되는지 당시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어 그는 “이들 보좌진이 삼성동을 오가며 정윤회씨를 만난 뒤 캠프 내 공론이 모아진 것이 180도 수정되는 것을 목격하며 삼성동팀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밝혔다.

수소문 끝에 글을 작성한 당시 캠프 관계자를 찾아냈다. 그는 “실제 삼성동 팀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닌 추론에 불과한 것이어서 글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지 몇 시간 만에 삭제했는데, 누군가 퍼가서 글이 남은 것 같다”며 “결국 일하면서 들은 소문에 기초한 것인데 정말 소문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망하지 않았겠느냐”고 덧붙였다.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이 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 자리를 넘기고 부속실을 빠져나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이 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 자리를 넘기고 부속실을 빠져나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번에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 문건이 공개되면서 수면 위로 등장했지만 정윤회 국정개입설은 그동안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지난해 10월에는 박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국빈방문에 정씨가 출국, 호텔 인근에서 3인방과 모임을 가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세계일보 문건 공개 후엔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지난 2006년 독일 방문 당시, 잠적한 것으로 알려진 정윤회씨도 동행했으며, 거기서 동행한 이정현 당시 비서와 비선문제로 대판 싸웠다는 이야기가 여권 관계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인도네시아 정윤회 동행설’과 관련해 당시 대통령을 수행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던 핵심 인사는 “당시 대통령을 수행했던 정호성, 안봉근은 언론 체크에 연설문 수정 등 거의 24시간 나와 함께 있었다”며 정씨와의 별도 모임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공직기강비서관실 문서에 등장하는 강남 중식당 모임과 관련해서도 “보통 새벽 5시에 나와 5시30분부터 업무를 시작해 자정이 넘어 퇴근하는데 청와대 반경 1㎞를 벗어나 약속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른바 ‘십상시’로 지목된 청와대 근무자 7~8명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너무 황당하고 개연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기자와 통화 후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이 인사는 단언했다. “한마디로 말해 소설입니다. 소설.”

이정현 의원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정씨의 독일 동행설 등과 관련해 사실 확인을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문자로 답했다. “전혀 전혀 전혀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이 이번 사태의 진면목입니다.” 이후 이 의원은 기자와 통화에서 “기자들은 많이 배운 사람인데 지금처럼 소설을 쓰고 있으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이 사태의 진상은 과연 뭘까.

앞의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는 개인 사견임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태에 휘말려 있는 누구도 대통령을 모시려는 충정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본다. 결국 소통의 문제다. 문제는 대통령이 허심탄회하게 소통할 사람이 현재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데 있는 것 아니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으니 추측이 나오는 것이고 풍문이 힘을 얻는 게 아닌가.”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 사람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똑똑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쓰디쓴 경험이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값진 교훈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에 낸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나오는 언급이다. 1년 전 기자는 박근혜 자서전의 이 대목을 인용하며 ‘박 대통령이 언급한 ’값진 교훈‘은 그가 앞으로 남은 임기를 수행하는 데 약이 될까, 아니면 독이 될까’라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임기 1년차, 안갯속 베일에 싸인 박 대통령의 인사논란과 관련한 기사였다. 1년이 지난 지금 그 결과는 ‘독’으로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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