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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과 ‘조율’

2014.12.11 20:54 입력 2014.12.11 21:00 수정
최유준 | 음악평론가·전남대 HK교수

서로의 ‘다름’을 살펴 인간에 대한 예(禮)를 지키면서 동시에 음악(樂)을 통해 마음의 벽을 허물고 ‘같음’을 나눌 수 있는 사회가 공자가 꿈꾸었던 이상사회였다. 유교에서 음악은 곧 사회적 관계의 은유다. 한자문화권에서 ‘조율(調律)’이라는 음악 용어가 음악 외적 영역의 ‘합의 도출 과정’까지 뜻하게 된 연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무슨 케케묵은 ‘공자왈’인가 싶겠지만, 최근의 서울시향 사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그렇다. 조율 능력의 총체적 부재, 그것은 물론 청와대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지만, 서울시를 대표하는 관현악단의 책임자가 직원들에게 자행했다는 인권 유린의 폭언이야말로 ‘예악(禮樂)’의 파탄을 드러낸다.

[시론]서울시향과 ‘조율’

문제의 박현정 서울시향 대표가 물 타기 기자회견을 자청해 정명훈 예술감독의 비리 혐의를 폭로함으로써 정 감독 또한 씻기 어려운 오욕을 남기게 되었다. 거액 ‘몸값’ 논쟁으로 수년 전부터 구설수에 올랐던 정 감독이지만, 동료 음악가들과 클래식 팬들은 그와 서울시향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의 뜻을 보이고 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소중히 여기는 음악적 가치, 그리고 정 감독이 만들어낸 서울시향의 의미 있는 변화가 속물들에 의해 하찮게 취급되는 듯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답답한 심정도.

하지만 그러한 심정이 일반 대중이나 시민에 대한 예의와 존중 없이 표출될 때 그것은 또 다른 속물주의로 전락한다. SNS에서 정 감독을 옹호하는 누군가가 그랬다. ‘정명훈이 예술가지 사회봉사자냐’고. 적어도 서울시향 사태의 맥락에서 그런 식의 발언은 사회봉사자에 대한 조롱이거나 예술가에 대한 조소거나, 혹은 둘 다에 해당한다.

클래식음악은 그 본질에 있어서 서유럽의 전통음악이다. 예컨대 빈필의 연주활동은 빈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그 도시의 시민이 자신들의 전통에 대해 갖는 자부심 등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서유럽 도시민들의 클래식음악에 대한 태도와 감정을 서울시민들에게 동일한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20세기 이후 클래식음악과 특히 교향악단은 보편적 의미의 근대성을 표상하게 됐지만, 교회나 궁정의 후원을 배경으로 한 서유럽의 전통음악이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의 세속화·상업화 추세에 부응해 근대화되고 제한적이나마 예술적 자율성을 획득하기까지는 수 세기가 소요됐다.

한국의 경우 전통음악에서 근대적 관현악으로 변화를 모색했던 시간이 짧고 전통과의 심한 단절이 있었다. 문화지체와 혼란이 있는 게 당연하다. 그 혼란을 조율해 가면서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서울시민은 얼마만큼의 비용을 감수할 수 있을까?

실제로 21세기 지구화된 문화적 환경에서 서울시향의 도약이 서울시민에게 유무형으로 안겨주는 이익이 있고, DG 로고가 찍힌 서울시향 음반이 상징하는 잠재적 문화경제효과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효과를 실감하기 어려운 다수의 시민들, 자신이 낸 세금이 포함된 시향 예술감독의 연봉 액수를 접하고 위화감과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들을 향해 구미의 교향악단과 세계 일류 음악인들의 사례를 무차별적으로 들이대며 ‘세계 표준 시세와 대우가 그러니 모르면 잠자코 있으라’고 훈계조로 말하는 이들의 유럽물신주의적 언행도 내게는 박현정 대표의 무례함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훈계가 아닌 대화와 설득이, 거친 명령이 아니라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 진정한 의미의 조율은 서로 다른 악기, 서로 다른 문화와 관습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가는 것이지, “절대음고 A=440hz, 평균율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음악 내적인 의미에서건 음악 외적인 의미에서건 조율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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