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터’가 된 캠퍼스, 눈감아온 당국 위선을 벗기다

2015.03.06 17:14 입력 2015.03.06 23:30 수정

‘대학 성폭력 은폐’ 고발한 다큐영화에 긴장한 미국

미국은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칠 것 같아도 ‘실례합니다’라는 말과 양보가 몸에 밴 ‘예의바른 문명사회’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종종 힘의 관계가 적나라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군대 내 성폭행에서 잘 드러난다. 남녀가 위계서열을 중시하는 폐쇄된 조직 내에서 몸을 부대낀다는 점에서 군대 내 성폭행이 많은 것이 신기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군대 못지않게 성폭행이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곳이 대학 캠퍼스라는 점은 의외다.

■ 영화 <사냥터>에 긴장하는 사람들

군대 내 성폭행 문제를 조명해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된 다큐멘터리 <보이지 않는 전쟁(Invisible War)>을 제작한 커비 딕과 에이미 지어링이 대학 내 성폭행 문제를 다룬 <사냥터(Hunting Ground)>를 만들었다. 이들은 대학을 돌며 <보이지 않는 전쟁> 상영회를 하던 중 ‘대학도 별로 다르지 않다’는 학생들의 반응을 접하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 지난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선보인 <사냥터>는 하버드대,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노트르담대 등 유명 대학들의 학내 성폭력 피해 학생들이 등장해 자신들이 입은 피해와 사건을 은폐하는 대학 당국의 위선을 고발한다. 군대 성폭력에 대한 국방부의 전면 조사와 개혁을 이끌어낸 유명 영화 제작자들의 새 영화에 미국 대학들과 교육부가 긴장하고 있다.

‘사냥터’가 된 캠퍼스, 눈감아온 당국 위선을 벗기다

■ 먹잇감, 포식자, 사냥터 관리자

제목이 암시하듯 성폭력 피해 학생들은 ‘먹잇감’, 가해자는 ‘포식자’, 경찰과 대학 당국은 이를 방관하는 ‘사냥터 관리자’로 그려진다. 영화는 대학 합격통지를 받고 기뻐하는 한 고교 졸업생의 환호에서 시작한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다큐영화는 이내 호러영화처럼 변한다.

이 영화에서 플로리다주립대 학생 에리카 킨스먼은 미 프로풋볼리그(NFL) 드래프트 1순위인 이 학교 미식축구 스타 제이미스 윈스턴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처음 털어놓았다. 아버지와 함께 영화의 인터뷰에 응한 킨스먼은 윈스턴이 2012년 신입생인 자신에게 술을 먹인 뒤 집으로 데려가 룸메이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욕실 문을 잠그고 타일 바닥에서 강간했다고 말했다. “싫다”고 했음에도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 경찰은 대학미식축구의 영예인 하이스먼 트로피 수상자인 윈스턴이 고소당한 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결론짓고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킨스먼은 경찰로부터 “여기는 엄청난 풋볼 타운이기 때문에 고소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고 주장했다. 대학 당국도 윈스턴에게 어떠한 징계도 가하지 않았다. 킨스먼은 ‘창녀’라는 비난에 시달리며 대학을 그만뒀다. 2010년 인디애나주 노트르담 세인트메리대 신입생이었던 리지 시버그는 대학미식축구 선수인 프린스 보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는 사건 직후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알리고 경찰 수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수사가 시작되기 전 “노트르담대 축구팀을 건드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는 협박을 받고 며칠 뒤 자살했다. 강간 수사는 종결됐다. 이 사연은 그의 아버지가 등장해 증언했다.

컬럼비아대 미대의 에마 설코위츠가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기숙사를 나서는 모습.

컬럼비아대 미대의 에마 설코위츠가 침대 매트리스를 들고 기숙사를 나서는 모습.

캠퍼스 성폭행 반대를 위한 전국 행동의 날 시위에 나온 학생들.

캠퍼스 성폭행 반대를 위한 전국 행동의 날 시위에 나온 학생들.

■ 성폭행 은폐하는 대학과 ‘프래터너티’

성폭행은 대학 스포츠팀과 더불어 미국 대학의 독특한 문화인 남학생 사교모임 ‘프래터너티(fraternity)’ 클럽에서도 자주 일어났다. 프래터너티는 ΣΑΕ(시그마·알파·엡실론) 같은 그리스어 문자로 이뤄진 전국적 친교 조직으로 대학 재정을 후원하고 신입생들이 프래터너티 기숙사에서 파티를 열며 인맥을 쌓는 곳으로 활용된다. 나중에 롤링스톤 잡지사가 보도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며 사과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2012년 버지니아대 집단강간 사건도 ΦΚΨ(파이·카파·사이)라는 프래터너티 파티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11월에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대 ΣΑΕ 프래터너티에서 16세 여학생을 강간한 남학생 두 명이 경찰에 고소를 당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마르코스 캠퍼스, 클리블랜드주립대, 브라운대, 캔자스대, 텍사스공대 등이 성폭행 문제로 프래터너티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거나 활동을 중지시켰다. 프래터너티 파티의 성폭행들은 대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진정제를 섞은 알코올 음료를 먹인 뒤 위층 침실로 끌고가는 식으로 일어났다.

사회평론가 케이틀린 플래너건은 성폭행 피해를 신고한 학생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받는 강력한 요인을 “미국의 프래터너티 산업”에서 찾아야 한다고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말했다. 영화 <사냥터>에서도 한 피해 학생이 프래터너티 사교장을 “규제받지 않는 주점”이라며 프래터너티 남성들이 비회원 남성들에 비해 강간을 할 확률이 3배 더 높다고 지적했다.

대학이 운동선수나 프래터너티의 빈발하는 성폭행을 덮기에 급급한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대학의 명성과 관계되거나 든든한 자금원인 사실과 관계가 있다. 영화는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들 대다수가 성폭력 자체보다 대학 당국으로부터 적대적이거나 피해자를 탓하는 반응을 접하고 더욱 힘들어 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군대 내 성폭행과 대학 내 성폭행의 닮은점이라고 제작자들은 말한다.

■ 예스가 예스를 의미한다!

성폭행 피해자를 보호할 법과 제도는 차고 넘친다. 미국에는 1986년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의 리하이대학 기숙사에서 강간 살해 당한 신입 여학생 진 클레리의 이름을 따서 대학이 학내 범죄와 통계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는 ‘클레리법’이 있다. 의회는 2013년 통과시킨 캠퍼스 세이브법에 데이트 폭력, 스토킹 등 성폭행을 클레리법에 의해 대학이 공개해야 하는 범죄로 추가했다. 문제는 영화 속에 드러난 대학들의 은폐 시도에서 보듯이 이러한 대책들이 현장에서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성관계 거부 의사’를 입증하는 것이다. 2010년 예일대 프래터너티 ΔΚΕ(델타·카파·엡실론) 소속 남학생들이 “거부(No)는 긍정(Yes)을 의미하고, 긍정(Yes)은 애널(Anal) 섹스를 의미한다”고 외친 동영상이 화제가 됐을 정도로 관념이 왜곡돼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지난해 대학들이 성관계에 있어 ‘거부’ 의사보다 ‘긍정적 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성적 동의’에 대한 지침을 만들지 않으면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법을 채택했다. 이는 ‘거부는 거부를 의미한다’는 소극적 차원의 성적 동의 개념을 넘어 양측이 적극적 동의하에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은 성적 정의의 조건을 ‘두 당사자가 건강한 정신상태에 있어야 하고,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과거에 했던 성관계나 로맨틱한 분위기도 성적 동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는 것이나 침묵도 긍정으로 해석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 자구책 마련에 나선 학생들

영화에 등장하는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의 애니 클라크와 안드레아 피노는 학교 측의 부당한 대우에 분노해 활동가의 길에 들어선 경우다. 이들은 성별에 따라 학교 내에서 어떠한 차별적 대우도 하지 못하도록 한 교육법 9조를 앞세워 연방정부에 대학을 고발하고, ‘대학 내 성폭력 근절’ 캠페인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국 전역의 대학들에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13년에만 67개 대학이 교육법 9조나 클레리법으로 학생들에게 고발을 당했다.

영화 <사냥터>는 미국 여대생 5명 중 1명꼴로, 남자 대학생 33명 중 1명꼴로 동료 학생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한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나 데이트 상대로부터 당한 강간이다. 이 통계에 따르면 올 한 해에도 미국 대학들에서 약 10만건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운데 신고되는 사건은 5%도 안된다고 영화는 말한다. 하버드대 로스쿨 다이앤 로젠펠드 교수는 “남학생의 부모들이 4~5명 중 1명꼴로 총기 사건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 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성폭행 두려움 때문에 대학 진학을 기피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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