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지 마세요

2015.03.30 20:56 입력 2015.03.30 21:42 수정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 “잊혀져 가는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
‘아이들의 지옥’을 바꿔달라는
당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그렇게 살지 마세요

보름 후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해가 된다. 여전히 제대로 된 진실 규명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건 1심 재판부는 “복원력이 매우 안 좋은 배에 지나치게 많은 화물을 부실하게 실었는데, 사고 당일 변침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조타 실수가 있었다”고 침몰 원인을 정리하지만 누구도 그게 침몰 원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히려면 ‘세월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양 작업은 미루어지고 있다. 인양 작업을 미루는 힘과 사고 원인을 은폐하려는 힘은 같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와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힘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분야에서 이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구체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연안 여객선을 지자체에서 인수하여 공공 운영하는 방안 같은 것이다. 의미 있고 실효성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그런 방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 사건이 온전히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월호 사건은 배의 문제였지만, 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가 배의 문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건 배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가 남았다는 뜻일 뿐이다.

비난 여론이 한참일 때 박근혜씨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사과했다. 철저한 진실 규명과 피해자 가족들과의 성실한 소통도 약속했다. 그러나 여론이 어지간해지자 사과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박근혜씨의 행태가 사악하고 파렴치하다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가 박근혜씨의 태도를 바꿀 순 없었다. 박근혜씨의 태도는 내면에서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론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난 여론에 사과가 필요했듯 ‘이제 그만하자’는 여론에는 사과가 필요없었다.

비극적이고 불의한 사건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히고 내 삶이 잠시 뒷전이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여론은 그렇게 변화한다. 어느 사회든 예외는 없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사회마다 다르며 속도가 느릴수록 성숙한 사회라 여겨진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가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른 편임을 보여주었다. 슬픔과 분노를 SNS에 도배하고 문화 예술 공연마저 불경한 짓이라 욕하던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며 킬킬거리게 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지나칠 만큼 짧았다. 왜 그렇게 짧았으며 짧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박근혜의 ‘사라진 사과’와 함께 사라진 또 한 가지, 성찰이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그렇게 살지 마세요

세월호 사건은 돈 귀신 들린 세상과 그런 세상과 타협한 사회 성원이 만들어낸 필연적 비극이자, 거대하고 장기적인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성찰도 터져나왔다.

‘아이를 더 이상 이렇게 키우지 않겠다’ ‘아이의 미래 행복을 핑계삼지 않고 지금 아이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단들이 도처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성찰이 사라진 자리는 사라진 다른 한 가지, 박근혜의 ‘사라진 사과’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비난’과 ‘박근혜 핑계’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았다. ‘사라진 사과’와 ‘사라진 성찰’은 연동했고 서로 의지했다. 둘은 잠시 브레이크가 걸렸던 돈 귀신 들린 세상의 재가동 신호였다. 둘은 실은 하나였다.

제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 해도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힌다. 식혀진 분노는 오로지 성찰로만 지속된다. 성찰이 사라지면 분노도 사라지며 분노가 사라지면 진실은 묻힌다. 성찰은 진실을 밝히는 유일한 연료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다. 성찰은 덮어놓고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게 아니다.

성찰은 사건을 만든 악의 총체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최악만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최악의 가장 큰 해악은 최악 자체가 아니라 최악 덕에 다른 악이 면책되는 것, 그래서 악의 총체성이 지워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수많은 비극적 사건 가운데 특정한 사건만이 사회적으로 사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건의 규모가 크고 희생자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원인이 사회적이며 해결 또한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사유되고 사회적으로 추모된다. 사회적 추모는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아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추모는 시간에 씻겨 내릴 뿐 아무런 사회적 변화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추모는 그 아이들의 죽음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어야 한다.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잊지 마세요’는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아이들을 통해 하려는 말이다. 그 말엔 그 아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려는, 그 아이들의 말을 우리의 필요와 편리에 맞게 편집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렇게 살지 마세요’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달라는, 그래서 그 아이들이 떠나기 전에 이미 10대 사망 원인의 첫째가 자살이던 ‘아이들의 지옥’을 더 늦기 전에 바꿔달라는 당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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