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암나무

2015.03.30 20:57 입력 2015.03.30 20:58 수정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이굴기의 꽃산 꽃글]개암나무

꽃을 염두에 두고 처음으로 간 곳은 남양주의 천마산이었다. 4년 전 이맘때의 일이지만 꽃에 대해 꽂혔던 때라 기억이 생생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하는데 느닷없이 나무 이름이 줄줄줄 나오지 않겠는가. “고욤나무, 개암나무, 화살나무, 소태나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어느 라디오에서 이문구의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에 등장하는 단편 제목의 나무 이름으로 첫 멘트를 잡은 것이었다. 그날 첫 산행에서 제법 많은 이름을 접했는데 특히 내 키만한 나무 앞에서 인솔자가 개암나무! 라고 호명했을 때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본 개암나무의 강렬한 암꽃이 옛 추억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도 하였기 때문이다.

오래전 입영통지서 받아놓고 시골의 큰댁에서 한 철을 지내면서 모내기를 했다. 논에 물을 찰랑찰랑 채우고 일렬로 죽 늘어서서 모를 심을 때 간격을 맞추기 위해선 나일론 못줄이 꼭 필요했다. 모두들 등을 구부리고 못줄에 달린 빨간 눈표마다 모를 꽂고 나면 양쪽에서 “어이, 주울!”이라고 소리치면서 못줄을 넘겼다. 그렇게 고단하게 모내기를 끝내면 까무라칠 듯 흐뭇한 풍경 속에서 도열한 벼들이 꿈꾸듯 자라나기 시작했었다. 그때 그 못줄의 눈표와 개암나무의 암꽃이 어쩌면 그리도 닮았겠는가.

최근 어쩌다 집짓는 일에 관여하게 되면서 건축 현장을 관찰하는 기회가 생겼다. 설계를 마치고 시공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나일론 줄을 이용해서 파일을 박을 위치를 정하는 ‘파일심보기’였다. 원점을 잡듯 교차하는 줄마다 박는 핀에는 바늘귀 같은 홈이 뚫렸고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그게 마치 꽃처럼 보인다 해서 현장용어로 ‘꽃심기’로 통한다고 했다. 이제 막 첫삽을 뜨는 공사장에서 만난 붉은 끈은 모내기할 때의 못줄, 다시 말해 개암나무의 암꽃과 어찌 그리 닮았겠는가.

부지런한 농부처럼 이른 봄에 일찍 암꽃과 수꽃을 한 그루에 나란히 피우는 개암나무. 허공에 보금자리라도 만드는 표시처럼 빨간 암꽃과 이삭 같은 수꽃을 달고 있는 개암나무. 자작나무과의 낙엽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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