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멘토

이이화

2015.04.26 14:39 입력 2015.04.26 14:43 수정

한국사를 대중화한 ‘별종’ 역사학자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어요.”

고졸 학력에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적도 없는 역사학자 이이화. 그는 젊은 시절 신문사 임시직으로 일하며 기사 색인 작업을 한 것이 ‘학사과정’이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문 고전 번역작업을 한 것이 ‘석사과정’이요,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 작업을 한 것이 ‘박사과정’이었다고 말한다. 대중적인 역사학자로 이름을 알린 그는 1994년부터 10년 간 22권으로 펴낸 필생의 역작 <한국사 이야기>를 통해 쉽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사와 생활사에 초점을 맞춘 새롭고 의미 있는 한국통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단재학술상, 2006년 임창순 학술상을 받으며 학술 업적을 인정받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에 참여했다. 역사는 현장을 누비면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가 걸어온 길을 만나보자.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틈만 나면 소설, 사회과학 책을 빌려봤죠.
계속 읽고 고민해보는 습관이 중요해요.”

Q.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선생님의 유년 시절이 궁금합니다.

아버지는 주역의 대가이자 한학자들 사이에 이름 높았던 야산 이달 선생이에요. 내가 어릴 때 산 속 암자로 데리고 가서 한문만 가르치고 학교를 안 보냈어요. 자식들은 물론 조카들에게까지 철저하게 한문만 가르쳤죠. 일제 때는 학교에 가면 일본놈이 된다고 했고 해방 뒤에는 학교에 가면 서양놈이 된다는 의식 때문이었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기대를 많이 거셨어요.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주역 팔괘의 하나인 이(離)자를 넣어 이화(離和)라는 특이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1년에 한 번씩 저를 어머니가 계신 집에 보내줬어요. 한국전쟁이 나던 해였을 거예요. 전북 이리, 지금의 익산에 사시는 어머니 계신 곳에 갔었는데 우연히 제 또래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봤어요. 하얀 교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는데 제 행색이 정말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그 무렵에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박계주의 <순애보> 같은 소설도 읽게 됐죠. 소설을 읽으니까 더 다른 세상이 보여요. 그래서 열다섯 살에 아버지 몰래 가출을 했어요. 학교를 가고 싶어서 가출을 한 거죠.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겨울이었어요. 막상 가출하고 나니 갈 데가 없으니까 부산으로 갔어요. 거기에 있는 고아원에 가면 먹여주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유일하게 정규 학교 졸업장을 받았던 광주고 시절. 앞줄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이화 선생이다.

유일하게 정규 학교 졸업장을 받았던 광주고 시절. 앞줄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이화 선생이다.

Q. 그렇게 고아원 생활을 거쳐 광주고까지 진학하셨죠?

부산의 고아원에선 피란 때니까 중학교에 가야 할 애들을 모아서 공부를 시켰어요. 교과서도 없었고 당시에는 <지능고사>라는 입시용 책만 있었어요. 전국 중학교의 입시 문제를 모은 책이죠. 그 책을 달달 외웠어요. 초등학교를 안 나왔으니까요. 그렇게 중학교 입학시험을 쳐서 한영중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때 고아원 원장들은 학교를 많이 보내려고 하지 않았어요. 일을 시켜야 하는데 학교 보내면 일을 시킬 수 없잖아요. 원장이 여러 가지로 부정을 많이 저질러서 어린 마음에도 저항심이 생겨 결국 고아원을 나왔어요.
여수 고아원에 갔다가 광주로 올라왔어요. 무작정 올라왔으니 잘 곳도 없었죠. 길가 평상에 앉아 있으니 ‘성경’이라는 모표를 단 학생이 지나가요. “형씨” 하고 불러 세웠어요. “사실 내가 오늘 잘 데가 없는데 어떻게 편의 좀 봐줄 수 있겠느냐”고 사정을 했죠. 내 사정을 듣고는 자기 자취방으로 데려가 주더라고요. 이후 근처 빈집에서 살면서 다방마다 ‘고학생입니다’라고 말면서 은단을 팔아 생계를 해결했어요. 세 끼 내내 고구마만 먹었죠. 겨울에는 이불이 없어 얻어 온 학생 코트를 덮고 공부를 했어요. 남은 돈은 땅에 묻어놓고 저축했어요. 어느 날 여관을 돌면서 물건을 파는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TG(True Group) 학원에 다니라고 권유하더라고요. 학원을 다니면서 입시 준비를 한 거죠.
입시철이 되니까 학원장이 가짜 지원 서류를 만들어줘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어요. 광주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죠. 광주일고가 막 생길 때니까 호남에서는 제일 명문이었거든요. 무난하게 합격해서 1955년 봄 마침내 고등학생이 됐죠. 등록금은 모아둔 돈으로 해결했는데 문제는 교과서 값이었어요. 딱 그 돈이 없는 거예요. 서무과장이 교감 선생의 서명을 받아 오면 받아주겠다고 했지요. 교감 선생님은 거절하더군요. “안 돼! 무슨 소리야 인마. 우리 학교는 그런 학교가 아니야.” 그리고 수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수업을 하루 종일 따라다녔어요. 퇴근 시간이 돼도 안 가니까 교감 선생님이 불러요. “정말로 교과서 값이 없느냐.” “예, 없습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해요. 나는 가짜 서류가 들통 날까봐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성적을 쭉 보더니 “어? 괜찮네?”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앞으로 10등 안에 들어야 한다고 약속을 하자는 거예요. 따질 게 어딨어요. 그렇게 동급생들보다 3년쯤 늦은 나이에 광주고에 합격했어요. 내가 유일하게 정식으로 학교 졸업장을 받은 게 광주고죠.

Q. 그런데 공부보다는 문학에 빠진 ‘문학소년’이 되셨다고요.

1968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돈암동 미아리 교정에서 동료들과 찍은 사진.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했다. 뒷줄 오른쪽이 이이화 선생.

1968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돈암동 미아리 교정에서 동료들과 찍은 사진.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중퇴했다. 뒷줄 오른쪽이 이이화 선생.

여관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수학 공부도, 단어 암기도 할 수가 없었어요. 통행금지 시각이 가까워 오면 사이렌이 울리기 전에 남녀가 뛰어들어오곤 했는데 정말 시끄러웠어요. 그러니까 어째요. 늘 귀를 막고 책만 봤어요. 주로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었는데 <에반젤린> 같은 시집도 있었죠. 그렇게 책에서 읽은 글귀들을 모방해 시나 수필을 써 보기도 했어요. 학교 교지에도 내고 서울의 학생 잡지, 지방 신문에도 투고했죠. 근데 투고하면 절반은 실리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문학 소년이 돼 버린 거죠. 이제 학교에서도 인정해주고 2학년 때는 학예부장도 맡았어요. 교지 편집도 도맡아 했고요.
광주고에 문인들이 많았어요. 선배로 박봉우, 박성룡, 후배로 문순태, 이성부 등 문예 전성기라고 했을 정도예요. 근데 그때 나도 한 자리를 낀 거죠. 어울려 다니니까 학교 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고교 3년을 마쳤는데 돈이 없어요. 장학금 주는 대학만 찾다보니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중앙대 문예창작과의 전신)에 가면 장학금도 주고 입학금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험을 봐서 장학생으로 입학했어요. 그런데 장학생으로 있었지만 먹고 잘 데가 없어요.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상경해 조그마한 방을 얻어 살았지만 정상적으로 다닌 건 아니고. 그래서 이제 중퇴를 했지요. 서라벌예대 중퇴한 것이 마지막 학력이 된 것이에요.

Q. 어머니가 위암으로 쓰러지면서 어려운 시기를 맞으셨죠.

그때 어려운 점이 좀 있었는데, 내 본적이 경상도 김천이었어요, 우리 아버지 고향이죠. 그땐 대개 본적을 그냥 놔뒀어요. 그리고 이사하면서 기류게 같은 기록을 잠깐 옮기는 식이죠. 그런데 내 주소가 일정하지 않았단 말예요. 그러니까 본적 기준으로 군대 영장이 나왔는데 내가 떠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이게 전달이 안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게 군 기피자가 돼 버렸어요. 그런데다가 5.16이 났으니 그때 기피자 잡으러 골목골목 검문하고 얼마나 엄해. 거기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이제 정상적으로 취직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어머니까지 서울에 올라오셔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요. 그래서 아이스크림 장사부터 빈대약 장사, 치약 장사, 외판원, 웨이터, 가정교사 등 참 다양한 일을 했어요. 하도 많아서 몇 개를 했는지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기였죠.
명동 ‘청동’ 다방으로 시인 오상순 선생을 찾아갔더니 <불교시보>를 창간한다는 최종화라는 분을 만났어요. 기자직을 제의받아서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르포를 썼죠. 월급은 적었지만 좋은 기회였어요. 고승들도 많이 만났고 불교 지식도 배울 수 있었죠. 이렇게 3년을 지냈고 아버지 제자가 운영하는 대전의 학원에서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은 겁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나는 팔자가 센 여자다. 내가 죽어야 너희 형제들이 잘 풀릴 것이다”라는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기피자 신분이 풀렸어요. 그 전에 풀렸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불교시보 기자로 있을 때 부산 범어사에서 찍은 사진. 당시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사찰기행문을 쓰고 불교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불교시보 기자로 있을 때 부산 범어사에서 찍은 사진. 당시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사찰기행문을 쓰고 불교에 관한 기초지식을 쌓았다.

Q. 어렵던 시절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고요.

해가 지면 명동에서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군밤 장수를 하면서도 낮에는 을지로 입구에 있는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어요. 한국사 책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특히 진단학회의 <한국사>는 기초를 다지는 교과서였어요. 이웃집 선배 집에서는 사회과학 책을 주로 빌려봤어요. 진보적인 사람들의 책을 틈만 나면 빌려 본 거죠. 체질적으로 난 늘 무언가를 읽는 타입이에요. 여관 종업원 노릇을 할 때도 신문이든 성인 잡지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어요. 난독(亂讀), 잡독 수준이었죠. 이 버릇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어떤 점에서는 장점이죠. 그 어려운 생활전선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은 거예요. 계속 읽고 나름대로 고민해보고 했어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일이 됐어요.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함께 모여서 성공한 거죠.”

Q. 동아일보 출판부에 취직하면서 사정이 좀 나아지셨다고요?

1967년 가을에 동아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게 됐어요. 원고를 다듬고 수정하거나 교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내 장점이 두 가지 있었어요. 하나는 한문을 잘 한다는 거, 두 번째는 문예 공부를 했기 때문에 문장을 다룰 줄 안다는 거. 남들보다 빠지지 않게 일을 잘 한다고 인정을 받은 거죠. 임시직이었지만 월급은 정규직하고 차이가 없었어요. 생활의 여유도 생기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어요. 똑똑한 기자들과 사귀게 됐고 당시 언론계의 거두였던 <동아일보> 주필인 천관우 선생님께 인정도 받았죠.
<동아일보> 창간호부터 기사 색인 작업을 맡기도 했는데 창간 직후인 1920년대부터의 갖가지 사회 사정을 알 수 있었어요. 어느 대학 사학과에 못지않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죠. 저는 6년 정도 동아일보에서 일했던 이 시절을 두고 ‘학사과정을 마쳤다’고 해요.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이화 선생이다. 생활에 찌든 모습이 얼굴에 나타난다.

시인 공초 오상순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이화 선생이다. 생활에 찌든 모습이 얼굴에 나타난다.

Q. 30대 중반 <창작과 비평>, <뿌리깊은 나무> 등에 글을 쓰면서 ‘이이화’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신문사에서 촉탁직(임시직)이 잘라요. 박정희 정권 때 동아일보가 광고 탄압을 받기 1년 전이었어요. 동아투위가 생기기도 전이니까 노조도 없던 시절이지요. 가장 힘 없는 부서, 가장 인기 없는 부서가 먼저 없어졌지. 내가 그때 이미 30대 중반이었는데 동아일보를 나오면서 ‘이제 글을 본격적으로 써야겠다, 원고료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월간 <신동아>에 신규식 평전을 썼어요. 신규식은 스스로 호흡을 단절시켜 목숨을 끊은 독립지사인데 국내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었죠. 이 글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한편으론 유신헌법이 선포됐던 시대였기 때문에 시대에 대한 분노가 있었어요.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술을 많이도 먹었습니다. 책을 읽거나 쓰면서 시간을 흘려보냈고 술을 마시면서 울분을 토해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죠. 그러다 신경림 시인을 만나게 돼요. 그때 신경림 시인은 동화출판공사 편집부장이었어요. <창작과 비평>을 많이 읽던 시절이었는데 신 시인이 창비에 글을 싣도록 다리를 놓아줬어요. 그래서 ‘허균과 개혁사상’을 창비에 발표했습니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당시 문필계에서는 창비에 글이 실렸다고 하면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지요. 또 민족문화추진회에 들어가서 고전번역 일을 보면서 <월간 중앙>에 1년 동안 ‘한국의 파벌’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했고 그때 창간했던 <뿌리깊은 나무>에도 글을 썼죠. <뿌리깊은 나무>와 <월간중앙>에 연재했던 글들은 나중에 <한국의 파벌>과 <역사와 민중>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고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창비에 썼던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도 그때 나온 글이죠. 서울대 최창규 교수가 척사위정론을 한국의 정통성이라고 들고 나왔죠. 제가 반박을 했어요. 척사위정론을 정통으로 볼 수 없고 그것은 주자학적 접근 방식이라는 논지였어요. 재야에서는 내 글을 많이 내세웠죠. 30대 후반부터 신문이나 잡지에 한국사 글을 쓰면서 집필가로 이름을 얻기 시작했어요. 신인인데 글도 참신했고 문장도 잘 다뤘고 역사를 제대로 공부했다는 평가를 받았죠. 그때 저는 한국사 관련 글만 쓰기로 결심했어요.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죠. 역사 대중화를 위해서 일반인 대상의 교양서를 써보기로 결심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저는 교수가 아니었으니 원고료를 받지 않으면 살 수 없었고 대중을 위한 글을 쓰는 게 살아가는 한 방편이었던 거죠.

Q. 서울대 규장각에서 일하실 때는 어떠셨어요?

민족문화추진회를 3년만에 그만두고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고전 해제를 했어요. 원전을 이해한 덕을 본 것이지요. 서울대 출신들도 영어는 잘했을지 몰라도 한문을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 박병호 선생이 해제집을 내야 하는데 나를 알고서 부른 거예요. 그래서 책 내는 작업을 맡아달라고 하기에 두 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출퇴근 시간을 따지지 마십시오. 또 내가 하는 일에는 간섭하지 마십시오.” 대신 약속을 했어요. 언제까지 책을 마쳐야 한다면 그때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한 거죠. 그렇게 서울대 박사과정 대학원생들하고 작업을 했어요.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했던 시대니까 우리끼리 끝나면 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서울대 도서관 앞 계단에서 학생들이 ‘유신 철폐’, ‘유신 타도’를 외치면 그 행사를 지켜보기도 하고. 신림동, 영등포를 거쳐서 서울역까지 시위할 때 따라다니고. 그런 시대였으니까요.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긴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서울대 규장각 박사 출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규장각 소장 서적들의 편찬 경위와 내용 요약, 책의 가치를 밝히는 해제작업을 했으니 일종의 ‘박사과정’인 셈이지요.

마흔한 살에 결혼 후, 첫째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이화 선생 부부.

마흔한 살에 결혼 후, 첫째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이화 선생 부부.

Q. 본격적으로 저술가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스카우트됐어요. 박정희 정권이 유신정권을 출범시킨 뒤 민족문화를 진작시키겠다고 만든 기관이었죠. 전문위원으로 일하다가 누가 어디서 일하냐고 물으면 머뭇거리게 됐어요. ‘정신병원’ 다니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죠. 결국 그만뒀어요. 그때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시기였어요. 마침 <허균의 생각>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몇 만부가 팔렸는데 원고 청탁이 많이 들어왔어요.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사 저술에만 몰두해도 살아갈 만하다, 그런 셈도 있었죠. 그래서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의 노력으로 한강 외곽 아치울 마을에 아담한 집을 지었어요. 서재를 꾸며 세상에 안 나오고 글만 쓰려고 했어요. 그렇게 26년을 그곳에서 살았어요.

Q.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는 어떻게 참여하시게 된 거예요?

1980년대 초반 한문서당 수강생 일행이 전남 장성 일대 동학농민전쟁 지역을 답사하는 길에 이 지역의 대표적 한학자였던 산암 변시연 선생 댁을 방문했다. 앞줄 왼쪽부터 이이화 선생,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변 선생 부부 순이다.

1980년대 초반 한문서당 수강생 일행이 전남 장성 일대 동학농민전쟁 지역을 답사하는 길에 이 지역의 대표적 한학자였던 산암 변시연 선생 댁을 방문했다. 앞줄 왼쪽부터 이이화 선생,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변 선생 부부 순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해에 임헌영 선생(현 민족문제연구소장), 서중석 선생(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등에게 연락이 왔어요.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드는데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가 자금을 지원한다는 거예요. 그때 박원순이 30대 초반이야. 막 변호사 해가지고 돈도 한창 잘 벌릴 때야. 그래서 나갔지요. 나갔더니 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연구소에서는 근현대사 중심으로 연구를 했지요. 한국 근현대의 여러 문제를 공동으로 연구하고 연구 내용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역사 대중화’가 연구소 목적이었어요.
내가 운영위원, 부소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한 일은 ‘19세기 민중운동사’ 모임이었어요. 동학농민 100주년(1994년)이 몇 년 안 남았으니 준비를 한 거죠. ‘한국 근대 민중생활사’ 세미나팀도 진행했는데 근현대 민중운동사를 본격적으로 써보겠다는 목표였어요. 조선 후기 두레·계(契)·동회(洞會)·향회(鄕會) 같은 마을공동체 조직을 살피면서 현장 답사도 많이 다녔고.
가장 보람찼던 건 역사문제연구소 사무실로 동학농민군 유족들을 초청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인 거죠. 그게 ‘동학혁명유족회’의 시작이에요. 답사를 다니면 유족들을 많이 만나니까 그렇게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거죠. 지금은 13,000명 정도 모여 있죠. 국회에서는 특별법까지 만들었어요. 그리고 2004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출범했고. 그렇게 확대된 거죠. 난 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모이니까 일이 되는 거라고.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서울 사직동 체신노조회관에서 열린 월례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회의 장면. 왼쪽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이이화 선생이다. 오른쪽은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

서울 사직동 체신노조회관에서 열린 월례 역사문제연구소의 운영회의 장면. 왼쪽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이이화 선생이다. 오른쪽은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

Q. 10년 동안 <한국사 이야기> 22권을 쓰셨습니다.

여러 활동을 하다보니 바빴어요.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국 통사를 쓰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마침 한길사 김언호 사장이 한국 통사를 써보자고 제의를 해왔어요. 김언호사장과는 내가역사기행, 역사강좌로 나가서 대화를 많이 했죠.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 늙으면 힘이 달려서 못 쓸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죠. 10년 동안 통사를 완성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장수 산골로 들어갔어요. 그때는 주례 서달라는 부탁, TV에 나와 달라는 청탁 그런 걸 다 끊어버렸어요. 아들에게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를 활용하는 법을 배웠어요. 능률이 오르더라고요.
장수 연화마을은 작은 산골동네였어요. 글 쓰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마을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시장 다녀오면서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꽁치 같은 생선도 가져다주고 그분들은 답례로 고구마, 옥수수를 마루에 두고 가시기도 하고. 참 재밌었어요. 연화마을에서 2년여 보내며 1차분 4권을 완성하고 김제 월명암, 그리고 아치울 자택으로 돌아와서 10년 만에 22권을 완성했습니다. 2004년이었죠.

10년 동안 22권으로 완성한 한국 통사 <한국사 이야기>.

10년 동안 22권으로 완성한 한국 통사 <한국사 이야기>.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현실 생활에 직결되는 실천 학문이에요.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학입니다.”

Q. 지금까지 무려 100여권의 책을 내셨는데,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100권이라는 건, 어린이용으로 ‘리바이벌’한 것도 포함한 거라서 다 저작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래도 이이화 저술이라고 하는 건 100권 정도로 잡으면 되지요. 그런데 옛날 원효 스님이나 다산 정약용과 같은 학자들은 손으로 썼어요. 밤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죠. 그런 악조건 속에서 썼는데 나는 얼마나 편안하게 썼는지 몰라요. 컴퓨터로 4~5배의 능률을 올렸죠. 그런 좋은 조건 속에서 쓴 것이지, 그렇게 고생스럽게 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2005년 7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으로부터 ‘역사와 미래를 위한 범국민자문위원회’ 위원 위촉장을 받고 있다.

2005년 7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으로부터 ‘역사와 미래를 위한 범국민자문위원회’ 위원 위촉장을 받고 있다.

Q. 그중에서도 역사 대중화에 초점을 둔 글쓰기를 오랫동안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살아온 조건 몇 가지가 맞았던 거예요. 우선 어릴 때 한문을 배워서 자료를 볼 줄 알았죠. 자료를 본다는 말은 쉬운 말로 표현할 줄 안다는 뜻이에요. 뜻을 모르면 할 수가 없죠. 또 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에 문장력과 표현력을 길렀죠. 역사는 종합 학문이에요. 두루두루 알아야 하죠. 그런 점에 옹색하지 않았던 것이 역사를 쓰는 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해요. 일반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와 문장을 역사책에 담아내야 대중화되는 것이죠. 혼자만 아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지금도 똑같아요.

Q. 인생에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으시다면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게 있어서 그런지 아무리 어려워도 비굴한 짓은 안 했어요. 정말 어려울 때도 도둑질은 안 했어요. 내 나름대로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애썼어요. 사회와 타협도 별로 하지 않았어요. 역사학자로서 독재정권에 영합하거나 반민주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고요. 유혹이 많았죠. 중앙정보부에서 정보원 제의가 온 적도 있었지만 다 거절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학자들이 유명해졌다고 여기저기 권력기관에 기웃기웃거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걸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Q.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

세상을 너무 출세 중심으로 보면서 탐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학자는 현실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한다, 자기의 가치, 존재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 중심의 인문정신과 더불어 사는 방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유럽 문화가 앞장선 것은 인문정신과 더불어 사는 정신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에요.

<인터뷰이 소개> 이이화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까지 학교를 다니지 않고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학교에 가고 싶어 가출해 부산의 한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 생활을 하다가 열아홉 살 때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서라벌예대 문창과 장학생이 되었으나 1년 만에 그만뒀다. 1964년 불교전문지인 불교시보의 기자가 되어 고승들을 접하고 불교 관련 기사를 쓰면서 한국사 연구에 뜻을 세웠고 1973년부터 <창작과비평> <뿌리깊은나무> <월간중앙> <월간조선> 등에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하며 역사학계에 데뷔했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했고 역사 바로잡기 운동, 동학농민혁명 연구, 과거사 청산 운동,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바로잡는 역사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95년 집필을 시작해 2004년 완간한 한국통사인 <한국사 이야기>(22권)를 비롯해 <허균의 생각>(1980), <인물로 읽는 한국사>(2008) <전봉준, 혁명의 기록>(2014) 등 100여권의 책을 썼다. 2001년 단재학술상, 2006년 임창순학술상 등을 받았으며 2014년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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