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시 중산층과 사교육

2015.04.26 21:02 입력 2015.04.26 21:22 수정
박해천 | 동양대 교수·디자인 연구

지난 세기의 전환기, 수도권 신도시는 사교육의 산업화를 위한 실험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신도시에서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룬 중산층 학부모들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라는 거주지의 이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후에는 ‘특목고 진학’이라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었다. 사실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 신도시의 학부모들 상당수에게 ‘사교육’은 말로만 들어보고 실제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세계, 그리하여 동경의 대상으로서 나름의 연혁을 갖춘 세계였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가 그 세계를 경유해 더 나은 미래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랐고,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를 원했다. 그들에게 사교육은 자녀의 미래를 위한 투자재이자 자신의 불안감 해소를 위한 소비재, 그 두 가지 성격을 지닌 서비스 상품이었다.

[별별시선]신도시 중산층과 사교육

돌이켜보면, 그들의 개인사 속에서 학교란 ‘국가’를 대리해 자신을 체벌하는 초법적 주체이자, ‘촌지’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는 탈법적 장소였다. 그러니 그들이 공교육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서비스 제공자와 사용자의 관계가 ‘시민의 권리’라는 극도로 추상화된 매개 항을 거쳐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부류의 것인 데다가, ‘군사부일체’ 같은 유교적 잔여물까지 끼어들기 일쑤였다. 학부모들이 이렇게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를 투명하게 응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회초리가 무서워 ‘국민교육헌장’을 억지로 외워야 했던 이들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는 뒷전에 버려둔 채 사교육 시장으로 향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소비자’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주도로 서비스 제공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한편, 신도시의 엘리트 중산층들에게 사교육은 이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P씨는 자신의 교육열이 삼대에 걸친 가족 드라마를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P씨의 아버지가 속한 세대는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낙오자 아버지들로 넘쳐났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그들의 발목을 제일 먼저 잡아챈 것은 봉건적 계급 질서와 농경문화였다. 얼마 후 해방의 소식이 전해졌고, 전쟁이 들이닥쳤다. 끝이 보이지 않던 혼돈과 파괴의 시간, 그들은 젊음을 완전히 소진해버린 후에야 거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챙길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기자,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이후의 세상 역시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근대화’라는 폭주 기관차가 등장해 그들을 따돌렸던 것이다.

그들이 보잘것없이 늙어가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으로 간직한 것은, 공부 잘하는 아들에 대한 기대였다. 그들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자식의 미래를 떠올리며, “저놈만큼은 틀림없이 보통 인물은 벗을 테니 어디 두고 보자”, “분명 저놈이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주문처럼 속삭이곤 했다. 그런 기대 덕분인지, 일찍 세상 물정에 눈을 뜬 아들들은 아버지의 무능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P씨는 자신이 그런 노력을 통해 고도성장의 흐름을 타고 신도시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P씨와 같은 이들에게 자녀 교육이란 중산층 진입 이후 다음 단계의 과업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들은 가족 드라마의 두 번째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학벌뿐만 아니라 자녀의 학력이라는 지표를 통해 자기 가족이 ‘특별한 가족’임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였다. 사실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 게임에 뛰어든 참여자들의 지적 능력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될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유전되는 것이 아닌가? P씨는 자수성가형 엘리트로서 나름의 사회경제적 입지를 다진 자기 세대 일부의 교육열이 그들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모종의 ‘혈통주의’를 동력원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앞선 세대의 엘리트 중산층과 마찬가지로, ‘족보 없는 집안의 족보 만들기’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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