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마저 수입하는 나라

2015.05.06 21:41 입력 2015.05.06 21:42 수정
표창원 | 범죄과학연구소 대표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다. 2010년 출간 이후 125만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 중이고, 샌델 교수는 방한 때마다 최고의 의전 등 ‘슈퍼스타’ 대접을 받고 있다. 지금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가 또 다른 형태의 ‘정의’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만화에서 시작한 단순한 ‘권선징악’ 슈퍼히어로 시리즈는 현대사회 모순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은유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폭력과 파괴가 주를 이루는 액션 장르 영화일 뿐이다. 평소 액션 영화를 보지 않는 이들까지 가세해 개봉 보름 만에 10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 자체의 재미나 엄청난 홍보, 대중 동조심리도 원인을 차지하겠지만, ‘나쁜 놈 혼내주는’ 시원한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도 바탕에 깔려 있다.

[표창원의 단도직입]‘정의’마저 수입하는 나라

반면, 국내 서적과 영화들은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고 그 뿌리를 파헤쳐 응징하는 내용보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나 악이 지배하는 막장 드라마, 복잡한 세상 문제에서 벗어날 힐링 이야기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불일치 속에서 슬프고 위험한 ‘외제 정의 상품 선호’ 심리가 읽힌다.

“우리는 모두 썩었고, 정의에 대한 이야기마저 ‘자기편’ 중심의 아전인수에 불과하다. 정의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부정과 부패는 처벌받고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은 보고 싶다. 그래서, 우리보다 정의로운, 편가름과 아전인수로부터 자유로운 외국의 정의를 구매하고 싶다.”

이런 심리는 비단 책이나 영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축구 국가대표 감독도 전략이나 전술 능력보다, 국내 지도자의 ‘인맥 중심 부정한 대표선수 선발과 운용’을 의심한다. ‘무조건 외국 감독이 낫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는 이유다. 영원할 것 같았던 국산차 내수시장 지배에 균열이 커지고 있는 배경에도 같은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제조사와 정부 사이 부정한 담합으로 안전과 성능, 가격의 적정성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다는 주장과 의견이 퍼지면서 ‘믿을 만한’ 수입차에 대한 선호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백수오 파문’은 식품 안전에 대한 ‘정의’마저 불신받게 할 여지를 남겼다. ‘언론’에 대한 외제 선호는 더 치명적이다. 국내 정치적 사건 보도에 있어 해외언론을 더 신뢰한다면 그 사회는 ‘저널리즘 정의’가 무너진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외제가 수입될 수 없는 분야로 알려진 국방과 치안, 사법, 정치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와 중동 등 자체 ‘국방 정의’가 획립되지 않은 나라들은 미국과 EU 등 외국에 국방의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고, 카리브해 연안국들의 해외 치안의존도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홍콩은 검사와 판사가 연루된 사법 비리 수사와 기소, 재판을 위해 영국 판사를 수입한 적이 있으며, 싱가포르는 주요 장관 자리를 해외에 개방했다.

성완종 게이트 및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된 ‘적폐’가 드러나고 해소되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권력의 불의와 불법 의혹은 무마되고, 약자나 죽은 권력에 대한 사정은 서릿발 같다면, ‘정의 해외의존도’ 현상은 확대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정부와 사법부, 국회는 물론, 민간, 시장 분야 ‘정의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수입품 애호는 국내 각 분야 생태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 결과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다. ‘정의 시스템 확립’이 시급하다. 그 출발은 ‘무엇이 유리한가’보다 ‘무엇이 옳은가’를 선택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문화와 관행의 정착이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와 각 정당, 사법부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비록 완전하진 않더라도, ‘기본적인 정의’가 지켜진다는 대중적 신뢰가 형성된다. 그래야 ‘나만 손해본다’는 불신 대신 ‘대체로 공정하다’는 ‘사회 정의에 대한 수긍’이 형성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독립국이 될 수 있고,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각 부분이 정상적인 운용과 발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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