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사랑의 결핍

2015.06.01 21:15 입력 2015.06.01 21:29 수정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사랑의 결핍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편견과 주관성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스스로 사유하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기대는 속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으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누군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런 한계와 모순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판단해야 하는 대상의 개인적 인격과 사회적 활동을 나누어 보는 건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 “그는 예술가로선 훌륭하지만 애인으로선 빵점이라 생각해.” 식으로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말에 대해 ‘이중적’이라 항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을 흔히 ‘빠’라고 한다. 빠는 ‘열렬한 지지자’와 전혀 다르다. 근대 대의민주주의에서 지지자는 제 철학과 세계관을 특정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통해 표현하는 정치적 주체다. ‘차이와 존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주체들은 나와 다른 지지와 지지자를 존중하는 의무를 갖는다. 어떤 정치인에 대한 내 지지가 존중되길 바란다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지지도 존중해야 한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을 비판할 권리는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병존한다. 근대 대의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그런 지지와 지지자들로 가까스로 작동되는 정치 체제다.

빠는 대상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다. 빠는 단지 자기애를 대상에 투사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비판에 보이는 태도로 쉽게 드러난다.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대상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많이 불편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대상을 위한 길이며 대상을 욕되게 하지 않는 태도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는 대상에 대한 비판에 무작정 반발하며 증오감을 드러낸다. ‘나에 대한 모욕이자 공격’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빠는 대상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듯하지만, 대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애의 실체는 자기 존중의 부족, 열등감이다. 빠는 대상을 무작정 옹호하는 행동을 통해 제 열등감을 해소한다. 그래서 ‘빠’는 또한 ‘까’이기도 하다.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은 무조건 옹호(빠)하고 그 이상화를 방해하는 대상은 무조건 폄훼(까)하는 ‘분리 행동기제’는 경계성 인격장애 등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병증이기도 하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사랑의 결핍

근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불거지는 빠는 역시 ‘노빠’일 것이다.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을 나누어 보길 거부하는,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에 대한 어떤 비판과 토론도 거부한 채 무작정 ‘노짱’을 추앙하고 ‘그런 대통령은 또 없다’ 말하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인간적 매력이 각별했던 만큼 인간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과 기억 앞에서 그들의 감정도 극단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빠들은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한다. 수구세력이 노무현을 없애고 싶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김대중이나 노무현 지지자들이 수구세력을 없애고 싶은 게 사실이듯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대한민국이라는 시궁창 속에서 고졸 학력으로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 과정과 세월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모멸과 고난에 맞닥뜨렸을지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노무현은 그런 모멸과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가진, 그럴수록 오히려 기개 있게 싸워 이겨내고야 마는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을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시절이 아니기에 노무현을 없애고 싶어 한 세력도 여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론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이다. 악화한 여론을 더 악화시켜 노무현을 궁지로 몰아넣은 건 바로 노빠들이다. 노무현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여러분의 마음은 잘 알지만, 이러는 건 오히려 나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는 요지의 글을 홈페이지에 남긴 적이 있다. 노빠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결국 부인과 형의 비리를 시인하고 한겨레에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사설이 실릴 만큼 궁지에 몰릴 즈음에도, 그들은 ‘생계형 비리’ 따위 강변이나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노무현 지지자는 박근혜 지지자보다 나은 사회의식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노빠와 박빠는 같은 병을 앓는 환우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비판이나 토론이 아닌 치료다. 지난 몇 해 동안 노빠가 한국 정치를 얼마나 퇴행시켜 왔으며, 그래서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가에 대해 굳이 더 반복할 건 없을 것이다. 물론 노빠라고 다 같진 않다. 어떤 사회적 존중도 필요 없어 보이는 중증 노빠도 있지만, 지지자이되 여린 성정 탓에 노빠의 영역을 맴도는 사람들도 있다. 노빠를 이용해 제 이해를 도모하는 노빠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사랑의 결핍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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