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의 ‘보도연맹 학살’ 진실 알리려 했다”

2015.07.09 21:40 입력 2015.07.09 23:07 수정

영화 ‘레드 툼’ 구자환 감독

“60여년 전 수십만명 희생 추정… 유족 명예 회복시켜주고 싶어”

가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피해자도 말을 하지 못했다. 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 툼(Red Tomb)>은 ‘진실’을 들려주고 있다.

‘빨갱이 무덤’이란 뜻의 <레드 툼>은 아직도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영화다. 인터넷신문 ‘민중의소리’ 기자이기도 한 구자환 감독(49)이 만들었다. 2006년 포항건설 노조원 하중근씨의 죽음을 다룬 <회색도시>(2007년)에 이은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로, 2013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2년 만에 상영관에 걸릴 수 있었던 것은 지난 3월부터 한 달여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진행한 시민 모금의 덕이 컸다.

영화 <레드 툼>을 연출한 구자환 감독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 씨네21 제공

영화 <레드 툼>을 연출한 구자환 감독은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 씨네21 제공

구 감독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삼은 나라에서 일어난 끔찍한 학살사건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며 “사건을 입 밖에 꺼내면 빨갱이로 몰릴까봐 한마디도 못했던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도연맹은 좌익에 물든 이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취지로 1949년 조직된 관변단체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 집단학살했다. 적게는 23만명, 많게는 4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영문도 모른 채 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전투와는 상관없는 지역에서 죽임을 당했다.

2004년 4월부터 촬영을 시작해 2013년 다큐멘터리 영화로 완성한 구 감독은 경남지역을 돌며 당시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았다. 유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고 한다. 80대 할머니가 당시 사건을 이야기할 때 옆에서 듣던 60대 아들이 흐느끼는 걸 목격해야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배경을 처음 들은 것이다.

박상연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구 감독은 말했다. 박 할머니는 23세 때 보도연맹 사건으로 남편을 잃었다. 임신 중이었다. 할머니는 늘 문을 열어놓고 지내왔다.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사도 가지 않고 남편 옷도 버리지 않았다. 구 감독은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 중이던 김말해 할머니의 사연도 덧붙였다.

“매장지가 발굴됐을 때 남편을 찾으러 간 할머니는 끔찍한 장면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시신 2구의 두개골에 대못이 박혀 있었던 거지요. 죽음을 앞둔 순간을 상상만 해도….”

<레드 툼>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군경의 감시하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의 사진도 담고 있다.

<레드 툼>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군경의 감시하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의 사진도 담고 있다.

구 감독은 촬영 중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보도연맹원으로 희생양이 될 뻔했다는 것이다. 사건을 취재 중이라고 하자, 어머니가 ‘순경이 경찰서 문을 열어줘 빠져나온’ 얘기를 들려줬다고 한다.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해 발굴작업은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일부 진행됐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중단됐다. 지금은 민간단체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구 감독은 “이승만을 국부(國父)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학살 자행세력을 애국자로 칭하는 이들은 역사와 희생자들에게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한 유족 여러 분이 세상을 등졌지만 보도연맹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0여년 전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지금은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생명을 박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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