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노동 존엄성’

2015.07.10 21:52 입력 2015.07.10 22:01 수정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사유와 성찰]잃어버린 ‘노동 존엄성’

서울의 수서역과 평택의 지제역을 연결하는 수도권 고속철도 율현터널이 3년5개월의 공사 끝에 지난달 개통됐다. 길이가 50㎞로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인 만큼 관통식도 비교적 성대하게 치러졌고 국토교통부 장관 등 100여명의 내빈이 참석했다. 그런데 그 행사장에 정작 그동안 작업해온 일선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6월29일자 보도에 따르면 “전날 밤 퇴근할 때 현장사무소에서 ‘장관님을 비롯해 높으신 분들이 오시니 내일 오전엔 출근하지 말고 현장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추구한다. 많은 경우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확인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듣거나 은연중에 선망의 시선을 받으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문제는 타인의 비천함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존귀함을 보여주는 경우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인간이 있어야 비로소 자아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마음이 부실하고 삶이 빈곤할수록 구별짓기에 매달린다. 내면이 허약한 사람들이 권력과 지위를 갖게 될 때, 그 힘을 남용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역학이 작동하는 배경에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신분관념이 있다. 신분제도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여러 기준으로 사람들을 위아래로 나누는 서열의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직업의 귀천을 구별하는 가치관이 그 한 가지 핵심을 이루는데, 육체노동의 극심한 비하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단순노무직이나 판매직, 농어업 종사자들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많고, 심지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의 그림과 함께 ‘중학교밖에 못 나왔으니 이런 일밖에 못하네’라는 말이 붙어 있다. 또 경찰청이 만든 수배전단에는 범죄자의 인상착의가 ‘노동자풍’이라고 버젓이 쓰여 있다.

직업과 재산을 기준으로 인간의 격(格)을 매기는 의식구조는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의지만이 아니라, 사람대접 좀 받고 싶다는 열망이 악착같이 공부하고 일하는 동기가 됐기 때문이다. 맹렬한 성취의욕은 상당 부분 결실로 이어졌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득보다 실이 많아진다. 자존감의 획득이 제로섬 게임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상인지 모른다. 나의 자부심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멸감을 맛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경제적인 상승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모든 영역이 공급과잉이고, 지구생태계의 에너지와 자원소비도 억제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제 일의 목적과 의미를 다르게 배치해야 한다. 오로지 돈벌이 수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움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변환해가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우선 노동을 통해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기본소득이 보장돼야 한다. 아울러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중과 관련이 있다. 노동에 대한 사회적 피드백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 노동의 맥락을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 바서의 시도는 한 가지 사례로 언급된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을 지을 때 노동자들이 단순히 시키는 대로 일하지 말고 디자인의 공동 주체로 참여해 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진짜 문맹은 창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창조성은 자기의 일을 귀하게 여길 때 발현된다. 그래서 바서는 일요일에 노동자들이 자기 가족들을 초대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했다. 과업 지시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의 주인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랐다.

공사장 인부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어떤 이는 그냥 벽돌을 쌓고 있다고, 어떤 이는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어떤 이는 성당을 건축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한다는 비유가 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얻는 보람은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런데 그 의의는 당사자의 행복감에 그치지 않는다. 일에 대한 정성은 곧 그 결과물의 질로 직결된다.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보도블록의 곳곳이 꺼지고 건물의 벽과 바닥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흔히 목격한다. 그런 부실함으로 인해 치르는 대가는 적지 않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최선을 기울여 완성을 하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한 제작 본능과 장인정신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우리 사회엔 너무 많다. 노동자를 천민 취급하는 풍조도 그 가운데 하나다. 터널의 준공식에 인부들의 접근을 금지시키는 발상은 천박한 권위주의의 병적 징후다. 우리는 그 비루한 근성을 떨쳐낼 수 있는가. 노동은 존엄해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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