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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시대의 염치

2015.09.15 21:04 입력 2015.09.15 22:03 수정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예전에 비해서 사용 빈도가 낮아진 어휘들이 있다. ‘얌체’라는 말도 그중 하나다. 친구 사이에서 “얌체 같다”는 말은 치명적인 욕이었다. 뭘 모르거나 어딘가 모자라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빤히 알면서 얄밉게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과는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얌체는 본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의 염치(廉恥)에서 왔는데 그 반대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얌체라는 지적이 줄어들게 된 것이, 체면과 명분을 강조하던 시대와 달리 대놓고 자기 이익을 추구해도 큰 흠이 되지 않는 세태의 반영인지도 모르겠다.

<소수의견>은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공권력의 잘못 및 그 은폐 시도와 싸우는 법정 영화다. 제작 완료 2년 만에야 성사된 상영을 앞두고 김성제 감독은 “법이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물음을 던지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결국 염치에 관한 영화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국가라는 실체도 없는 적과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검사를 향해 주인공은 “해부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실험용 개구리처럼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서둘러 검사님께 지원 요청을 한 사람은 누굽니까? 정말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이 영화에서 피고 대한민국에 요구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염치였다.

[송혁기의 책상물림]뻔뻔한 시대의 염치

사람도 아닌 국가에 염치를 요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염치는 애초 국가에 요구된 덕목이었다. <관자(管子)>의 첫 편 ‘목민(牧民)’에서 국정의 강령인 ‘사유(四維)’로 제시된 것이 예의 염치다. 염치를 ‘잘못을 은폐하지 않고 그릇된 길을 따르지 않음’이라고 풀이하고, 국가가 떳떳함을 잃고 잘못을 덮기에만 급급하다면 결국 회복 불능의 상태로 멸망하게 된다고 하였다.

일말의 염치라도 있다면 진즉 물러났어야 할 이들이 버젓이 지도층을 채우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너나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염치 따위는 안중에 없다. “간곡한 사양으로써 상의 공정함과 위엄을 지키고, 제 작은 염치도 보전하는 노릇을 삼고자 합니다.” 선정 과정에 간접적으로나마 간여했다는 이유로 만해문학상 수상을 고사하며 던진 김사인 시인의 겸손하지만 단호한 말 한마디가 이토록 빛을 발하는 것은, 이 시대의 지독한 뻔뻔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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