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

2015.11.24 21:03 입력 2015.11.25 11:52 수정
이대근 논설주간

분단 70년을 맞은 올해 우리는 한참 뒤처진 북한, 개도국들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하나의 역사가 끝났다고 말하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신중하면 좋겠다.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기 전에 좀 더 생각해볼 게 있다. 역사의 패자로부터 잠시 최후 진술을 들으며 그게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평화재단이 최근 창립 11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탈북자가 본 남한 사회를 소개한다. 남한 11년째인 최모씨의 말이다.

[이대근 칼럼] 우리는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

“여기는 인생이 뭐 딱 정해져 있잖아요. 뭐 중학교 졸업하면 고등학교, 고등학교 졸업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 얻어야 하고. 또 환경이 서로 잘 맞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아이 낳고 집 사고. 노후를 맞이하는 게, 야 인생이 이렇게 정해져 있구나. 깜짝 놀랐어요. 인생을 어떻게 정해서 살지? 근데 그대로도 안되잖아요. … 특히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주어진 거에 쪼들려 사는 게 안타까운 거예요. 자기 잠재력이나 하고 싶은 거 못하고, 부모님의 기대나 가치 또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나 기업이 요구하는 것에 맞게끔 자기를 만들어야 하니까. 불쌍해요 사실.”

그는 북한 생활을 이렇게 회고했다. “온갖 죽음을 보고 굶어죽을 뻔해도 그냥 그 자체로 저였어요. 규정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작 남한에 오니 “기초생활수급자라느니 탈북자라느니 항상 규정당하는” 일을 경험했다. 남한 거주 10년째인 림모씨. “남한은 그대로 말하면 야비한 그런 경쟁이에요. 북한 승벽(勝癖·경쟁심)은 뭐랄까, 누가 하나 차지했다고 자기 혼자 다 먹진 않아요. 여기선, 그런 게 없어요.” 7년째인 양모씨. “여긴 완전 약육강식이야, 약자는 살아갈 구멍도 없어요.” 탈북 후 캐나다에서 3년 살다 온 한 여성은 캐나다와 달리 북한에서 형성된 자기 정체성을 강제로 지워야 하는 획일적 분위기를 지적한다. 그는 같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남한 저소득층 가정을 볼 때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다. 탈북자 자녀에게 있는 작은 혜택도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이게 탈북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지닌 이들이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라는 의심이 들면 국제 기준을 적용해볼 수 있다. 탈북자의 관찰은 국제 지표로도 뒷받침된다. 정부 신뢰도는 인도네시아, 에스토니아가 한국보다 높다. 사법부 신뢰도 역시 멕시코가 높고, 콜롬비아와는 비슷하다. 남녀 임금차는 네팔보다 크다. 노인이 살기 좋은 나라 순위는 스리랑카, 필리핀이 더 앞선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삶의 질은 칠레, 멕시코가 더 높다. 필요시 도움 구할 친지가 있다고 응답한 한국인의 비율은 36개국 중 꼴찌다.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 믿을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하루 중 아빠가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3분, 21개국 중 21위다. 이 모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적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승리인가?

☞ ‘이대근의 단언컨대’ 팟캐스트 듣기

세계적으로 유별난 이 나라에 견줄 나라를 하나 찾을 수 있다. 미국이다. 지난해 말 아이다호 한 월마트. 29살의 젊은 엄마는 두 살짜리 아들을 카트에 앉히고 쇼핑했다. 아들은 엄마 가방에 손을 뻗어 그 안에 있는 총을 잡았다. 곧 총성이 울렸고 옷을 고르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미국에선 흔한 총기 사고다. 미국이 특별한 건 이런 종류의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태도다. 파리 테러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는 “프랑스 시민들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거다. 흑인교회 난사 사건까지 겹친 지난 9월 총기구매 신청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사회 안전보다 나의 안전이라는 개인적 합리성을 추구하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총기 사고라는 집단적 비합리성을 낳는 사회, 이게 미국이다. 한국인은 이런 미국인을 비웃을 자격이 없다. 한국도 미국만큼 특별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각자도생으로 이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데도 “험한 세상을 살려면 독해져야 한다”며 더 강한 이기심과 치열한 경쟁심을 서로 부추기며 모두를 힘든 삶으로 몰아간다. 물론 미국과 다른 점이 있다. 미국인은 남을 죽이지만, 한국인은 자기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만2563명, 한국인 자살자는 1만3836명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총이 없지만,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다.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미국인은 국가 개입을 좋아하지 않는다. 강력한 공권력에도 총의 자유를 각각 제 손에 쥐려 한다. 그렇게 미국인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자살 친화적 사회를 정당화할 가치가 우리에겐 없다. 이렇게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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