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만 판매 허가 ‘가습기 살균제’

2015.11.25 20:34 입력 2015.11.25 20:37 수정
최예용 |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아빠, 왜 텔레비전 뉴스에 나와?”

“엄마 때문에.”

“엄마가 왜?”

“생각 안 나? 엄마가 그렇게 죽었잖아.”

“아파서?”

“그래, 일찍 자야 키 큰다.”

가습기살균제로 부인과 배 속의 둘째를 잃은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나눈 전화 대화이다. 이 아빠는 도보와 자전거로 지난 16일 부산을 출발해 주요 도시를 거치며 아내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간 제품을 만든 제조사를 살인죄로 처벌해 달라며 각 지역에 거주하는 피해자들과 함께 지방검찰청에 민원을 넣고 있다.

[기고]한국만 판매 허가 ‘가습기 살균제’

2011년 2월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으로 119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간 지 일주일 만에 아내와 배 속의 아이를 잃은 이 아빠는 그 해 8월말 보건복지부의 역학조사 결과를 보도한 TV뉴스를 보고 집안을 뒤져 자신이 사다가 가습기 물통에 넣었던 ‘세퓨’라는 살균제를 찾아내고 망연자실했다. 자신의 손으로 아내를 죽인 거라는 충격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직장을 그만두고 충북 옥천의 작은 절에 부인과 아이를 안치고 2년간 곁을 지켰다. 아들의 폐도 딱딱하게 굳는 피해가 확인되었다.

검찰이 4년 만에 수사한다는 소식과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접수를 올해 연말까지만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의행동을 결심했다. 필자가 동행하기로 했다. 각 지역에 있는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앞에서 환경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 대형마트의 자체 브랜드 PB상품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다수의 소비자가 사망과 폐질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가습기살균제 제조사들은 피해 대책은커녕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평소 그들이 말하는 기업의 사회책임은 온데간데없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모두 530명이고 이중 사망자는 143명이다. 건강한 사람도 살균제로 죽고 다치는 마당에 다른 병을 앓거나 건강이 좋지 않던 사람이 살균제를 사용하면 더 악화될 게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의 판정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관련성 낮음’ 또는 ‘관련성 거의 없음’ 판정을 받은 피해자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이들은 모두 정부가 주는 병원비와 장례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공식 피해발표에도 빠지곤 한다. 제조사로부터 지원금을 돌려받지 못할까 봐 관련성이 높은 피해사례만 지원하기 때문이다. 2011년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제조사를 수사하지도 않았고, 피해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결국 제조사들에 면죄부를 준 결과가 됐다. 살인사건에 대해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 밝혀냈다면, 당연히 살인범을 처벌하고 피해자를 위로해야 하는데, 살인범을 놔둔 채 피해자보고 소송하라고 했던 게 정부 처사였다.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가습기살균제라는 제품은 한국에서만 만들어 팔았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죽이는 살균화학물질에 사람들이 노출되면 마찬가지의 건강 이상과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의 기업, 정부, 전문가들만 몰랐던 걸까?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일본에서 발생한 수은중독사건인 미나마타병과 독일에서 산모의 입덧완화제 약으로 인해 1만여명의 기형아가 발생한 탈리도마이드 사건에 견줄 만한 세계적인 환경 참사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기업들이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를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돈에 눈먼 기업과 자본주의의 본 모습이 원래 그런 건가 싶을 정도다.

피해자를 외면한 건 일본과 독일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부들도 마찬가지다. 외면하고 외면하다 십수년이 지나 미봉책으로 사건을 마무리해온 패턴이 하나같이 똑같다. 국가와 정부의 속성 역시 그런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

항의행동은 서울까지 2주 동안 진행되며 지난 주말에는 경기도 여주의 한 사찰에 안치된 엄마와 태아를 찾아 제를 올렸다. ‘당신과 아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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