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김무성에게만 관대한가

2015.12.21 20:52 입력 2015.12.22 15:18 수정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또다시 설화를 빚었다. 지난 18일 연탄 배달 봉사활동을 하던 중 나이지리아 출신 유학생에게 “니(너)는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이 똑같네”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 제임스 피어슨 로이터통신 특파원은 트위터에서 “정말 어이가 없다” “(막말로 악명높은 미국 대선주자) 트럼프 같아…”라고 비판했다. 영국 유학생 곽민수씨는 페이스북에 “영국의 야당 총수쯤이 나에게 ‘너 피부색이 치즈 색깔이랑 똑같구만’이라고 했다면, 사임하라는 여론이 영국 곳곳에서 터져나왔을 것이다. 실제 사임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글을 올렸다.

한국에선 어떤가. 일부 언론이 작은 기사로 다루고 소셜미디어에서 시끄러웠을 뿐 ‘사임 요구’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표면적 이유는 김 대표가 사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였다(그 까닭은 뒷부분에서 언급하겠다).

[경향의 눈] 왜 김무성에게만 관대한가

김 대표의 막말이 ‘뉴스’로 대우받지 못하는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우선 언론에서 김 대표의 정치적 무게와 영향력을 무시하는 측면이 있다. 차기 대선주자 레이스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지만, 2017년 최종적으로 새누리당 후보를 거머쥘 수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 시선이 짙다. 박근혜 대통령 앞에만 가면 납작 엎드리는 그를 보며 ‘(대통령)감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김무성이라는 개인과 새누리당이라는 보수정당에 관용적인 잣대다. 김 대표의 별명은 ‘무대(무성대장)’다. 통 큰 보스, 터프한 상남자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 미디어는 김 대표의 잦은 말실수를 자질 문제가 아니라 ‘선이 굵은’ 스타일 탓으로 돌린다. 친절하고 너그럽다. 문재인·박원순·안철수 등 야당 지도자들이 김 대표처럼 막말을 쏟아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어떤 이유로도 김 대표의 막말은 면책될 수 없다고 본다. 정치분석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김 대표는 유권자들의 관점에서 차기 대선주자 1위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을 넘보게 될 줄 상상이나 했던가. 유력 대선주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 돼야 옳다. 개인적 성격이나 스타일을 감안해서 봐줄 일도 아니다. 21세기에 마초라는 게 자랑거리는 아니지 않나.

아프리카 유학생의 얼굴 색을 연탄 색에 비유한 데도 놀랐지만, 페이스북에 올린 사과문 내용에는 더 놀랐다. 김 대표는 “친근감을 표현한다는 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발언이었다고 했다. “손녀 같아서” 골프장 경기보조원을 추행했다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 해명을 연상케 한다.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다짜고짜 반말하며 피부색을 언급하는 것은 친근감의 표현이 아니라 상식·교양·지성 부재의 고백일 뿐이다.

이쯤에서 김 대표의 ‘어록’을 짚어본다. 분야별로 엄선했다. ①여성 폄훼 “아기 많이 낳는 순서대로 (여성) 비례 공천을 줘야 하지 않나” “대통령 유고 시 여성 총리에게 국방을 맡길 수 있겠나” ②언론관 (전 비서 구속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에게) “너는 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③노동관 (열악한 아르바이트생 처우를 호소하는 청년에게)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 방법이 없다” “쇠파이프 휘두르는 파업만 없었으면 국민소득 3만달러 넘었을 것” ④집회의 자유 “촛불집회, 대통령이 공권력으로 확 제압했어야” “세계가 복면 뒤에 숨은 IS 척결 나선 것처럼 우리도 복면 뒤 숨은 시위대 척결 나서야” ⑤색깔론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90%가 좌파” ⑥지역주의 “전국이 강남만큼 수준 높으면 선거가 필요없다” ⑦외교 결례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다”….

부지불식간에 속마음을 들켜버리는 실언을 ‘프로이트의 말실수(Freudian slip)’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말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억압된 무의식이 의식에 개입해 남에게 감추고 싶은 생각을 본의 아니게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김 대표의 말실수를 가벼이 넘겨버릴 수 없는 이유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품위 있는 진보’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동의한다. 다만 품위가 진보에만 필요한 덕성은 아니다. 품위 없는 보수 또한 용납하기 어렵다. 김 대표에게만 특별히 관대할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김 대표에게 보스 기질과 남자다움을 입증할 효과적 방법을 알려드리겠다. 오랫동안 모셔온 박 대통령에게 충심으로 직언을 해보라. 대통령이 ‘레이저’를 쏘더라도 굴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여보라.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해야 ‘상남자’ 자격이 생긴다. 권력자에겐 쩔쩔매면서, 외국인·여성·노동자·청년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터프한 게 아니라 지질한 거다.

관련기사 김무성, 아프리카계 유학생에 "연탄색과 얼굴색 똑같아"....공식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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