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은 혐오표현일까?

2016.02.16 20:54 입력 2016.02.16 20:56 수정
손희정 | 문화평론가

“기독교혐오는 왜 다루지 않나요? ‘개독’도 혐오표현이잖아요?”

‘혐오표현의 실태와 대책’이라는 포럼의 청중석에서 나온 질문이다. 포럼은 한국 사회의 혐오에 대해 진단하고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의 실태를 살펴본 뒤 법적, 제도적 대응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성소수자 및 ‘좌파’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기독교 혐오세력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는 혐오에 대한 논의의 장에서 오히려 기독교가 ‘역차별’당하고 있다는 항변이었다(물론 ‘개독’이란 말이 포럼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난감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혐오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의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청춘직설] ‘개독’은 혐오표현일까?

요즘 한국 사회에서 ‘혐오’는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되었다. 모든 것이 ‘혐오’로 쉽게 설명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여성혐오’라는 말이 그렇다. 지난 2년간 ‘여성혐오’가 해온 역할은 분명하다. 여성들이 무언가 부당하다고 느껴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 ‘여성혐오’라고 이름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부당한지 몰랐던 것들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게 되었고, 함께 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도 있었다. ‘여성혐오’는 여성에게 언어와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생겼다. 너무 많은 것이 ‘여성혐오’로 불리며 말의 힘이 약해지거나 여성에 대한 배제와 차별, 폭력의 복잡한 결이 오히려 단순화되기도 했다. 덕분에 ‘페미나치’라거나 ‘남성혐오’와 같이 본질을 흐리는 말도 등장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혐오’가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의 사용에 부당함을 느끼는 경우가 생기거나 “혐오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또 다른 혐오”라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된 것이다.

점증하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현실적으로 다루려면 ‘혐오’의 의미를 한정적으로 규정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혐오표현의 실태와 대책’은 그런 구체화를 시도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논의된 ‘혐오’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혐오의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 개인의 감정을 법적,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감정을 빌미로 특정 집단을 낙인찍은 뒤 폭력을 휘두르고, 제도적 차별을 조장하며, 그렇게 타인을 실존적으로 위협할 때, 우리는 그것을 ‘혐오표현’이라고 이름하고 규제할 수 있다. ‘혐오표현’을 ‘증오조장’ 및 ‘차별선동’으로 재규정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그러므로 ‘개독’을 혐오표현으로 다루려면 그 말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구직활동에 제약이 생기며, 일상생활에서 폭력을 당하는 등 차별의 대상이 된다면 당연히 기독교에 대한 혐오 역시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개독도 혐오표현”이라는 말은 언어 전도다. 동성애혐오와 기독교혐오가 한 탁자 위에 올라갈 수는 없다. 동성애자들은 특정 종교에 대해 집단적으로 증오하고 합법적으로 차별하자고 선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한다. 그것도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서 말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아서고 서울시민인권헌장과 관련해서 박원순 시장을 무릎 꿇게 한 것을 기억해보라.

‘남성혐오’라는 말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얼마 전 JTBC <뉴스룸>에서는 메갈리아를 ‘여성일베’라 말하고 ‘남성혐오’ 운운했다. 그런데 메갈리아가 남성들을 차별하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나는 미러링이라는 전략이 나와 다른 타인을 미워하고 편을 가르는 강력한 감정인 혐오를 내면화하는 것을 염려한다. 무엇보다 때때로 이주민이나 타 인종, 성소수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러링을 비롯해 소위 ‘남성혐오’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활동은 단순하지 않다. 폭력의 쾌락에 동참하는 유희이거나 관심을 끌기 위한 왜곡된 인정투쟁일 수도 있지만, 일상이 된 폭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일 수도, 그와 싸우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이런 복잡한 움직임을 하나의 단어로 정리해버리는 것은 편리하다. 사유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널브러져 있는 말을 주워 조합하면 된다. ‘남성+혐오’ ‘기독교+혐오’ ‘역+차별’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성혐오’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공유되기까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사유하고 힘겹게 싸워야 했던 수많은 관습과 편견, 제도적 차별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남성혐오’라는 말은 얼마나 게으른가.

‘여성일베’도 다르지 않다. 이 말은 한국 사회에서 혐오가 만연해지는 맥락을 단순화하고 일베가 표상하는 사회의 모순을 남녀 성대결로 간단하게 바꿔버린다. 혐오의 문제를 남녀의 성대결로 치환했을 때 ‘손 안 대고 코 푸는 자’들은 누구인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임금 격차를 자연스럽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는 자본가들에게나 이득이고, 복지를 ‘가사’라는 이름의 여성 무급 노동으로 해결하는 것은 책임을 최대한 가볍게 하려는 정부에나 이득이다. ‘우리’끼리 다툴 일이 아닌 것이다. 사유의 게으름이야말로 혐오와 싸우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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