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홍준의 안목 - ‘검이불루 화이불치’ 어쩌면 그렇게 자연과 잘 어울릴 수 있는가

2016.02.29 20:47 입력 2016.03.28 14:03 수정
유홍준 |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우리 고건축의 미학

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장대한 석조건축물들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전, 중세의 고딕 성당, 근세 귀족들의 저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잘생기고 오랜 연륜을 갖고 있는 것에 부러움을 느끼며 우리에게 그런 건축문화가 없음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 고건축에는 서양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미학이 있다. 절대로 문화적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지난해 말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 5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한 ‘한국건축예찬-땅의 깨달음’전(3월27일까지 연장 전시)은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전시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 종묘·창덕궁·수원화성 등 궁궐 건축, 해인사·불국사·통도사·선암사 등 사찰 건축, 도산서원·소쇄원·양동마을 등 양반건축 열 곳을 주명덕, 배병우, 구본창, 김재경, 서헌강, 김도균 등 대표적인 사진작가들의 사진 작품과 함께 고건축 관련 회화와 지도, 거기에다 건축 모형, 최신 정보기술(IT)을 활용한 디지털 돋보기(DID), 3D 입체영상 등을 곁들여 옛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안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b>경주 양동마을 전경  주명덕</b>

경주 양동마을 전경 주명덕

■서양 부럽지 않은 우리만의 아름다움

이 전시회를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고건축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자연환경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감동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건축의 중요한 요소를 순서대로 꼽자면 첫째는 자리앉음새(location), 둘째는 기능에 맞는 규모(scale), 셋째는 모양새(design)이다. 그런데 건축을 보면서 규모와 모양새만 생각하고 이보다 더 중요한 자리앉음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물(Building)만 보고 건축(Achitecture)은 보지 않은 셈이다.

[공감 70년] (3) 유홍준의 안목 - ‘검이불루 화이불치’ 어쩌면 그렇게 자연과 잘 어울릴 수 있는가

우리 조상들은 궁궐이든 사찰이든 민가 건축이든 자리앉음새에 아주 민감했다. 경복궁은 북악산과 인왕산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지어진 것이고, 도산서원은 낙동강 강변 아늑한 곳에 자리 잡았고, 부석사는 백두대간 산자락을 널리 조망할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무량수전을 앉힌 것이다.

건축의 자리앉음새란 좌향(坐向)이라고 해서 건물을 어떻게 앉히느냐를 말하는데 전통적으로 풍수의 자연원리에 입각했으며 우리나라 풍수의 기본 골격을 마련해 준 분은 전설적인 스님 도선(道詵·827~898)국사였다. 도선의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하여 고려, 조선,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어왔다. 그 좋은 예로 <고려사> 충렬왕 3년(1277)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들 수 있다.

“삼가 도선 스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피건대 ‘산이 드물면 높은 누각을 짓고 산이 많으면 낮은 집을 지으라’ 하였는데 산이 많은 것은 양(陽)이 되고 산이 적으면 음(陰)이 되며 높은 누각은 양이 되고 낮은 집은 음이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산이 많으니 만일 집을 높게 짓는다면 반드시 땅의 기운을 손상시킬 것입니다. 그 때문에 태조 이래로 대궐 안에 집을 높게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이것을 금지했습니다. 지금 듣건대 조성도감(造成都監)에서는 원나라의 건축 규모를 인용하여 몇 층이나 되는 누각과 다층집을 짓는다고 하니 이것은 도선의 말을 그대로 좇지 않은 것이요, 태조의 제도를 준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은 강(剛)하고 땅은 유(柔)한 덕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장차 무슨 불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니 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흔히 우리 건축은 스케일이 작다는 것을 결함으로 말하곤 하지만 사실 이는 스케일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의 적합성에서 나온 결과인 것이다.

■봉암사의 창건 과정

건축에서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는 것이 얼핏 들으면 겸손하라는 뜻으로만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겸손하지만 비굴해서는 안되고 당당하지만 거만해서는 안된다는 인생의 가르침은 건축에도 그대로 통한다. 나말여초에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가 구산선문의 하나인 문경 봉암사를 창건할 때 이야기다. 당시 덕망 높은 스님으로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지증에게 하루는 문경에 사는 심충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제가 농사짓고 남은 땅이 희양산(曦陽山·998m) 한복판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기이하여 사람의 눈을 끄니 선찰(禪刹)을 세우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에 지증은 그를 따라 희양산으로 향했다.

<b>경남 합천 해인사 전경                   주명덕</b>

경남 합천 해인사 전경 주명덕

희양산은 오늘날에도 일 없인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로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 줄기에 우뚝 솟은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화강암 골산이다. 최치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다. 지증은 희양산으로 가서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 산중의 계곡 지세를 살피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여기가 절로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881년, 대사는 불사를 일으켜 절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절이 완성되어 갈수록 지증에게는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법당을 웅장하게 지어도 희양산 산세에 눌려 절대자를 모신 법당의 위용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고민 고민 끝에 지증은 건물 기와추녀를 날카로운 사각뿔 모양으로 추켜올리고 불상도 석불상, 목불상이 아니라 철불상 두 구를 주조해 앉힘으로써 비로소 그 지세를 눌렀다고 한다. 최치원은 지증대사의 비문을 쓰면서 이 사실이 대사께서 생전에 하신 여섯 가지 현명한 일 중 세 번째에 해당한다고 했다.

■인각사의 무무당

건축에서 자연과의 적합성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건물의 유기적인 배치인데 우리 고건축은 여기서도 뛰어난 인문정신을 발현했다. 경주 안강에 있는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성리학적 원리에 입각해 지은 것이고, 안동 내앞의 의성김씨 학봉종택은 학봉 김성일의 선비정신이 구현된 건축이다. 옛 선비들이 건축의 안목이 높았음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예로는 목은 이색이 군위 인각사(麟角寺)의 무무당(無無堂)에 부친 글에 잘 나타나 있다.

<b>경북 안동 도산서원 전경             김도균</b>

경북 안동 도산서원 전경 김도균

목은은 인각사 스님의 청탁을 받아 무무당의 낙성을 축하하면서 인각사의 가람 배치를 볼 때 “대체로 불전(佛殿)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강당이 있고, 오른쪽에 살림채가 있는데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 건물은 멀어 건물 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방 옆에 세워 좌우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고 일단 치하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기존의 선방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며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애초에 내가 목은의 이 무무당 기문을 주목한 것은 그 이름의 속뜻이 궁금해서였는데 의외로 이런 건축 비평이 들어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그러나 정작 그 뜻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아쉬웠다. 없을 무(無)자 두 개를 겹쳐 쓰면 ‘없고 없다’는 뜻도 되지만 ‘없는 게 없다’는 뜻도 된다. 어느 것일까? 그런데 목은은 “무무당의 뜻은 거기 사는 분들이 더 잘 알 것이기에 나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항시 궁금증으로 남아 있던 중 돌아가신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없고 없는 것이 없는 게 없는 겁니다.”

■궁궐 건축의 미학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궁궐이란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그 시대 문화능력을 대표한다. 궁궐 건축에는 사찰이나 민가에서 따라올 수 없는 장엄함과 화려함이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정조대왕은 <경희궁지(慶熙宮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b>전남 담양 소쇄원 광풍각과 제월당 일대의 겨울 풍경                            구본창</b>

전남 담양 소쇄원 광풍각과 제월당 일대의 겨울 풍경 구본창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보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는 곳이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왕조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궐의 제도는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 보여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정도전이 말한 이 건축 정신은 일찍이 김부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한 말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신작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번역하자면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고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이 아름다운 미학은 궁궐 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으며,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오늘날에도 계승 발전시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간직해야 할 소중한 한국인의 미학이다.

지난 세밑이었다. 명절 때만 되면 목욕탕에 갔던 추억이 일어나 아래 동네에 있는 사우나에 가다가 큰길가에 있는 미장원 앞을 지나는데 한자와 한글이 병기된 입간판이 있어 잠시 발을 멈추고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글귀를 내건 서울 미 카사 미용실.  유홍준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글귀를 내건 서울 미 카사 미용실. 유홍준

“최고의 미용실. 미 카사. 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놀랍고도 기쁜 마음이 그지없었다. 이제는 미장원까지 이렇게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에 동의할진대 오늘날 우리 시대 건축들은 어떤 것인가 잠시 반성해 보게 된다. 면면히 이어온 우리의 이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은 건축이 많이 세워져야 먼 훗날 후손들이 ‘그네들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우리 시대의 삶을 존경하고 그리워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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