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에게 한국 진보의 길을 묻다

2016.03.04 14:42 입력 2016.03.04 14:55 수정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참여를 선언한 후 미국 사회를 요동치게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 샌더스 열풍이 한풀 꺾이는 조짐이다. 샌더스는 경선 첫 관문인 아이오와주에서 ‘대세’라던 힐러리 클린턴을 턱밑까지 추격한 데 이어 뉴햄프셔주에서는 클린턴을 큰 차이로 앞서며 ‘정치혁명’을 일으키는 듯했지만, 10여개주 동시경선이 치러진 지난 1일 ‘슈퍼화요일’ 경선에서 힐러리에 완패했다.

샌더스가 자신이 공언한 ‘정치혁명’을 완수할 가능성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만, ‘샌더스 현상’이 한국정치의 비주류라 할 한국 진보·소수 정당에 던지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샌더스 현상은 보수세력의 아성인 영남 지역 중소도시의 시장으로부터 출발해 국회의원에 이르기까지 30여년 간 정치 경력을 쌓은 한 무소속 진보 정치인이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여해 문재인 대표와 박빙 승부를 벌인 것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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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과 청년층의 불만이 유례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가에도 한국판 ‘샌더스 현상’의 출현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변화의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는 진단이 곳곳에서 나온다. 소득불평등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알려진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교 교수는 지난 16일 영국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샌더스가 경선의 최종 승자가 되긴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그는 언젠가 또다른 샌더스가 결국 대선에서 승리해 미국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우리는 지금 1980년 레이건 당선 이후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말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진보·소수 정당은 샌더스 현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사진제공=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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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참여를 선언한 후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기자들에게 샌더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이후 샌더스가 거둔 성취는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샌더스는 대선 첫 관문인 지난 1일 아이오와주 경선에서 1위 클린턴에게 불과 0.4%포인트만 뒤졌다. 뉴햄프셔주에서는 클린턴을 20%포인트 차이로 따돌리며 압승했다. ‘슈퍼화요일’(3월1일) 경선에서 힐러리에게 완패했지만, 미국 주류 언론의 냉대 속에서 클린턴 진영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으며 민주당의 ‘좌클릭’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혁명’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6월 ‘2세대 진보정치’를 내걸고 정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해 화제가 됐던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한국보다 양당제가 강한 미국에서 심지어 무소속 사회주의자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 진보정당은 왜 못하나. 부럽기도 하고 고무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소수정당이나 무소속 정치인의 제도권 정치 진입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공고한 양당 체제, 고비용 선거 구조, 사회주의를 금기시하는 정서 등 미국에서 샌더스의 성공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던 장벽들은 한국 진보정치의 성공을 어렵게 하는 이유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 샌더스가 강조해온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대안적 정치세력의 필요에 대한 문제의식은 한국 진보정치 세력의 주장과 동일하다. 샌더스 현상은 한국 진보정당 또는 소수정당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해 문재인 대표와 박빙 승부를 벌이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진보정치가 맞닥뜨린 상황은 별다른 주석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다. 노동자 기반 대중정당 건설을 목표로 했던 2000년 이후 한국 진보정당의 제도권 정치 실험은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은 후 더는 확장하지 못하고 내부 정파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위축됐다. ‘생활정치·다양성 정치·녹색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2012년 창당한 녹색당도 19대 총선에서 정당득표 0.48%에 그쳐 등록이 취소됐다 재창당하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조성주 소장은 “미국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샌더스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샌더스가 벌링턴 시장으로서 지역에서 쌓은 성과들과 미국 의회 의정활동 과정에서 샌더스가 보여준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다.

첫 선거였던 1972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샌더스는 자유연합당 소속으로 2%를 득표했다. 1972년 버몬트주 주지사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1%에 불과했다. 1976년 주지사 선거에서는 6%를 얻었다. 결국 그는 ‘제3당’ 후보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를 접었다. 1980년 버몬트주 벌링턴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그는 영세한 교육용 영상제작 사업을 했다.

1981년 민주당 후보를 단 10표 차이로 제치고 벌링턴 시장에 당선한 샌더스가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다. 사진제공=원더박스

1981년 민주당 후보를 단 10표 차이로 제치고 벌링턴 시장에 당선한 샌더스가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에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있다. 사진제공=원더박스

벌링턴 시장 선거에 임한 샌더스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이전 선거들에서 그는 미국 유권자들에게 경제민주화 없이는 정치민주화도 없다는 것을 알리는 ‘교육적’ 목적에 만족했지만, 시장 선거에서는 달랐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번 선거(시장 선거)는 ‘교육’이 목표가 아니었다. 이기는 게 목표였다. 벌링턴 시민이 당면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거의 온 힘을 집중했다”고 밝혔다.

시장이 된 샌더스는 이념을 주장하기보다 구체적 변화를 추진했다. ‘진보가 권력을 잡으면 재정을 낭비한다’는 미국 사회의 편견을 깨고 시 보험정책에 들어가는 세금 수만달러를 절약했다. 저소득층 주거여건 개선을 위한 주택건설을 추진하고, 전임시장이 추진하던 호수변 고급 콘도미니엄 건설 사업을 중단시켰다. 임차인 권리법안을 통과시키고 마이너리그 야구단을 유치했다.

샌더스는 정파의 이익보다 주민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 그의 좌파 동료들이 GE의 군수품 생산공장을 폐쇄하려다 체포됐을 때 샌더스는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샌더스는) 추상적인 세계평화보다 일자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미국 주간지 ‘더네이션’의 정치 칼럼니스트 존 니콜스는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에서 “샌더스는 정책과 정치를 분리시키고 실생활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에 관한 심층적인 토론을 진행시키는 데 성공했다. 보통 이런 토론은 당리당략에 묻혀 버리곤 한다”고 말했다.

벌링턴 시장 시절의 샌더스가 시청이 바라보이는 벌링턴 시내 호텔 옥상에 서 있다. 사진제공=원더박스

벌링턴 시장 시절의 샌더스가 시청이 바라보이는 벌링턴 시내 호텔 옥상에 서 있다. 사진제공=원더박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북 구미시 기초의원으로 당선됐다 녹색당에 입당한 김수민 녹색당 대변인은 진보정치가 지역에서 생활의제를 기반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역에서 활동해보면 아무리 보수적인 어르신들도 경로당을 직접 찾아와 민의를 알아보려는 정치인에게 ‘색깔’을 들먹이진 않는다. 샌더스가 보여줬듯 보수적인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일관된 메시지를 갖고 꾸준히 다가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샌더스는 보수와 손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했던 시기에 연방하원 의원을 지내면서 많은 수정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공화당이 지배하는 하원에서 독자 법안을 통과시킬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무소속 지위를 활용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좌우 제휴를 성사시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런 유연함은 공화당 의원조차 “서로 98퍼센트 의견이 달라도 동의하는 2퍼센트를 찾아서 협력하면 되지 않나. 일부 민주당 의원들보다 버니가 그런 점을 훨씬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하게 만들었다. 조성주 소장은 “샌더스의 성공은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현실적인 성과를 내며 풀어온 여정의 결과다. 한국의 진보도 문제의식은 유지하면서 아주 현실적인 대안을 갖고 성과를 쌓아야 한다. 필요하면 보수와 타협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협이 곧 노선의 우경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샌더스는 1981년 벌링턴 시장 당선 이후 30여년 정치 이력에서 경제정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신념을 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상대 후보나 언론이 지겨워 할 정도로 같은 말을 반복해왔다. 샌더스는 공화당의 텃밭으로 불렸던 버몬트주를 풀뿌리 진보정치의 진원지로 바꿔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 일부에서 보수 유권자들을 겨냥해 보수 또는 중도 노선으로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벌링턴 시장 4선을 한 샌더스는 199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뒤에 보이는 인물은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선 후보로 1912년 미국 대선에 출마했던 유진 뎁스.  사진제공=원더박스

벌링턴 시장 4선을 한 샌더스는 199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뒤에 보이는 인물은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선 후보로 1912년 미국 대선에 출마했던 유진 뎁스. 사진제공=원더박스

사회적 불평등과 청년세대의 어려움은 미국과 한국이 공유하는 문제다. 이 문제에서 한국이 미국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볼 근거는 조금도 없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세계최고 수준인 미국에 육박한다. 미래를 책임질 청년층은 한국 사회를 지옥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샌더스 현상이 생길 수 있을까.

샌더스처럼 무소속으로 지역에서 탄탄한 성과를 일군 정치인이 있더라도 한국에서 비슷한 현상의 출현을 기대하긴 어렵다. 김세균 정의당 공동대표는 “한국은 보수세력의 지배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제1야당을 넘어설 수 있는 정당이 먼저 조직되지 않으면 샌더스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샌더스처럼 무소속 정치인이 전국적 이슈가 되는 것은 미국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사례”라며 “그런 현상이 지속가능하려면 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샌더스가 일부 지지자들의 불만에도 2016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기로 한 것도 무소속이나 제3정당 후보로 출마하기에는 장벽이 너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물과 정당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운동이 없는 상황에서 진보정당만으로 샌더스 현상이 생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샌더스의 뒤에는 자발적으로 뛰는 열광적인 풀뿌리 지지층이 있다. 2011년 ‘1 대 99 사회’라는 화두를 던지며 반향을 일으켰던 월가 점령 시위대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도 지난해부터 샌더스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월가 점령 시위대가 상위 1%의 경제력 지배 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의 샌더스 열풍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온라인 풀뿌리 조직 무브온도 지난 1월 샌더스 지지를 선언했다.

미국정치 연구자인 정치학 박사 김만권씨는 “샌더스 현상은 운동만으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눈뜬 풀뿌리 운동이 제도권을 통해 개혁을 추진하는 전 세계적 현상의 일부”라며 “풀뿌리 운동이 제도권 내의 비주류 정치인 가운데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해줄 사람을 찾아내 주류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무명의 좌파 정치인 제러미 코빈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대거 노동당에 입당해 코빈을 당 대표로 만들었다. 지난해 스페인에서는 금융위기 이후 긴축재정에 반대해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이 만든 정당 포데모스가 창당 2년 만의 첫 총선에서 단숨에 제3당으로 도약했다.

한국의 경우 새로운 정당의 출현은 물론이고 기존 진보·소수정당이 정치적 시민권을 확보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정권을 가져가면서 선거구도가 새누리-반새누리 구도로 흘러가는 데다 과거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이 갖고 있던 ‘제3당’으로서의 입지마저 국민의당에 빼앗겼다. 노동당 부대표를 지낸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우리 사회의 진보적 여론이 표출될 수 있는 길이 계속해서 막혀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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