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배면뛰기, 관용

2016.03.20 20:50 입력 2016.03.20 20:52 수정
조환규 | 부산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컴퓨터과학계의 초대형 입자 가속기 실험과 같았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은 알파고의 위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승패도 흥미로웠지만 필자의 흥미를 끈 것은 이 상황을 접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었다. 3국까지 연속 패배 이후 1200개의 알파고 CPU 개수를 사람 두뇌와 비교한 불공정성 시비도 있었다.

[과학오디세이] 인공지능, 배면뛰기, 관용

하지만 두뇌 세포의 수와 세상 모든 컴퓨터의 소자 수를 비교해 볼 때, 이런 관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단 인간의 경우, 최고수와의 대결을 위해선 반드시 바닥부터 순서대로 이기고 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전략을 기보로 노출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을 알파고에 면제시켜준 것이 인간에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이세돌 9단의 4국 승리에는 앞서 패한 3판에서 얻은 정보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프로기사들은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알파고의 황당한 수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창의성을 격찬하며 그 응용을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인간 독점 영역인 창의성까지 침입한 기계문명을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둑을 포함한 인간의 문화에는 모두 내재된 관습,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바둑에서의 기풍, 유행하는 포석이 이에 속한다.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 정립된 관습은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빠른 시간에 기력을 올리는데 기존의 정석이나 바둑 격언은 도움이 된다. 허황된 수에 집착하다간 자질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된다.

이런 패러다임은 바둑뿐만 아니라 예술, 과학에까지 존재한다. 그런데 알파고는 엄청난 계산력으로 수천만번의 ‘황당한’ 수순을 검토해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영역을 찾아낸 것이다. 바둑이론에 대한 새로운 검토의 필요성을 말한 이세돌 9단의 발언은 이번 대국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 바둑계에서 통용된 다양한 가치, 예를 들어 두터움과 옅음, 기세, 뒷맛 등 이런 것을 ‘확률’이라는 ‘표준통화’로 통일시킨 것은 바로 바둑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높이뛰기에서 등 쪽으로 누운 채로 막대를 넘는 배면뛰기는 지금 알파고 충격과 비견할 정도의 엄청난 반전이었다. 딕 포스베리는 1968년 올림픽에서 이 기술로 금메달을 받았다. 다른 선수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 창의적 기술은 막 개발된 발포 고무가 충격방지 매트로 쓰이면서 시도되었다. 포스베리 이전에는 왜 이 방식이 없었을까. 그런 황당한 시도를 해본 선수는 코치들에게 쓸데없는 짓거리 말고 가르쳐 준 기술이나 열심히 연습하라는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뒤로 뛰는 것은 높이뛰기의 정석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에는 이같이 항상 혼란과 비효율이 존재한다.

창의성의 필요조건은 다양한 시도이며 그런 시도를 용인해주는 관용의 정신이 창의성 탄생의 핵심이다. 시끄럽고 다양한 목소리보다는 표준화된 목표와 방법, 이미 관습적으로 잘 짜인 절차가 더 바람직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창의적 발상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관용은커녕 도리어 편 가르기에 열을 올리는 불관용이 도를 넘고 있다. 창의와 자유가 주제인 부산 국제영화제와 관련한 최근의 논란과 분란은 그 모순의 현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창의는 탐나지만 분란은 용서치 않겠다는 생각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호랑이 가죽만 날름 벗겨오겠다는 심보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당국 주도의 인공지능 총궐기 대회가 벌어질 분위기다. 유행은 나노과학, 줄기세포, 빅데이터를 지나 지금의 인공지능에 도달했다. 이렇게 시류에 편승해 모두 같이 하나의 산에 올라가 남김없이 태워 먹는 화전민 경작방식으로는 어떤 창의적 문화나 과학기술도 불가능하다. 산업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탐내기보다는 ‘별 쓸데는 없지만’ 재미에 빠져 ‘배면뛰기’를 시도하는 연구자가 늘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황금알인 알파고의 인공지능을 탐낼 것이 아니라 그런 황금알을 낳은 거위인 허사비스 탄생의 과정에 더 주목해야 한다. 우리를 놀라게 한 알파고의 창의성은 사실상 허사비스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다.

대학총장을 뽑는 알고리즘 하나도 구성원 맘대로 만들지 못하게 규제하는 상황에서 창의적 한국형 알파고가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모순적 욕망이다. 단 한 종의 올바른 교과서, 진실한 사람만이 대우받는 이런 극단의 불관용 세상에서 배면뛰기를 시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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