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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업무 대기상태…‘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허하라

2016.07.29 14:36 입력 2016.07.29 21:33 수정

‘퇴근 후 카카오톡 금지법’…현실화까지 남은 과제는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내일 미팅 장소가 어디지?”

홍보회사에 다니는 ㄱ씨(32)는 오늘도 새벽 1시에 상사에게 카카오톡(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내일 미팅’은 ‘늦은’ 오후다. 대개 이런 연락은 급하지 않은 것일 때가 많다. 처음엔 ‘밤늦게 미안하지만’ 같은 형식적 멘트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ㄱ씨가 하는 업무와 관련된 단체 카톡 대화방은 5개. 초 단위로 알림 메시지가 울려 꺼놓았지만, 대신 스마트폰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ㄱ씨는 퇴근 후 새벽 1시에 미팅 장소를 묻는 카톡 메시지 같은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퇴근 후 일정 시간 이후엔 메신저 알람을 꺼놓고 다음날 아침까지 신경쓰지 않고 싶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전화가 오겠지’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막상 그러려니 ‘일에 열정이 없는 사람’으로 비칠까 두렵다. 이것이 꼭 자기 회사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국 회사들의 ‘이상한 업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ㄱ씨는 “언제, 어디서, 무슨 지시가 떨어질지 몰라 늘 일정 정도의 긴장감을 안고 사는 것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실 유수열 비서(30)도 ㄱ씨와 같은 생각을 했다. 지난해 재·보선과 올해 4·13 총선 때 선거캠프에 쏟아지는 전화와 메시지를 보고 느꼈다. 꼭 필요한 연락도 있었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있었다. 식사를 할 때도, 화장실에 갔을 때도, 업무를 마친 후 새벽녘에 잠시 집에 들렀을 때도 카톡 알림음은 멈추지 않았다.

‘퇴근 후 여전히 업무가 계속된다면 퇴근은 무엇일까’ ‘업무시간 외에도 업무 지시가 내려진다면 근로로 봐야 하지 않을까.’ 유 비서는 노동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선거가 끝난 뒤 ‘퇴근 후엔 업무연락을 하지 않도록 법안화하는 게 어떨까’ 하는 문제를 놓고 의원실 내에서 논의가 진행됐다.

실효성 문제 등 찬반이 갈렸지만 “이런 법이 꼭 필요하다”는 의원의 결정이 내려졌다. 의원 자신도 이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이었다. 유 비서의 아이디어는 법안화되었고,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들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이 발의한 이른바 ‘업무시간 외 카카오톡 금지법(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이다.

■‘업무와 연결되지 않을 권리’

신 의원이 발의한 법안의 핵심은 퇴근 후 업무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 ‘근로자의 권리’라는 것이다. 법안은 근로기준법 6조 2항을 신설해 ‘법에서 정하는 근로시간 이외의 시간에 전화(휴대전화 포함), 문자메시지, SNS 등 각종 통신수단을 이용해 업무에 관한 지시를 내리는 등 근로자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 법안은 아직까지는 “근로자의 사생활을 보장해줘야 한다. 업무시간 외 연락을 사용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된다”는 선언적인 의미에 가깝다.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그간 논의되지 않았던 ‘업무와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해 사회적 환기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시각이 많다. 신 의원은 29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아직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이런 피해를 입는 것이 주로 청년층인 만큼, 현재 분위기로 봐서 입법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디까지를 ‘근로시간’으로 봐야 할까

이 법안이 실제화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를 근로시간으로 봐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다. 근로시간은 근로자가 그의 노동력을 사용자의 지휘·감독하에 두고 있는 시간이다. 실제 근로에 돌입하지 않았더라도 근무를 위한 ‘대기시간’도 근로시간에 포함된다.

예컨대 당직의사의 업무 대기시간은 근로시간이다. 최근 개정된 근로기준법 50조 3항은 “근로시간을 산정함에 있어 작업을 위하여 사용자의 지휘·감독 아래에 있는 대기시간 등도 근로시간으로 본다”고 규정했다.

문제는 당직의사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근로자들도 스마트폰 등 통신기기의 발달로 인해 퇴근 후에도 언제든, 어디서든 업무를 할 수 있는 ‘대기상태’가 된 현실이다. 대기시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지, 그 시간이 사용자의 감독 아래 놓여 있는지는 구체적 사안에 따라 다르게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고용노동부 산하 임금근로시간 개혁추진단은 올해 초 한국노동연구원에 스마트기기 사용 등 근로행태 변화가 근로시간에 미치는 영향과 사례에 대한 연구용역을 의뢰하고 연말쯤 결과를 받아볼 예정이다.

■퇴근 10분 뒤 “메일 전달해달라”고 하면

업무의 범위도 중요한 문제다. 퇴근 후 10분 뒤 상사에게 업무 e메일을 전달해달라는 카톡이 왔다. 메일을 찾아 보내는 데 1분의 시간이 걸렸다. 이것을 근로로 봐야 할까. 대기업에 다니는 ㄴ씨(29)는 “유관부서에서 급한 일이 있고 나만 그 일을 아는 상황이라면 퇴근을 했어도 연락을 해야지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빨리 답을 요구하는 상사가 있어 힘들기도 하지만 그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안별)’라 법으로 규정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임금근로시간 개혁추진단 관계자는 “그런 정도까지는 근로로 보기 어렵지 않느냐”며 “상식적인 직장생활 중 일부분으로 볼 것인지, 명확한 구분 기준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업무의 범위에 관해 정리된 학설이나 판례는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보다 앞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 개념이 논의된 독일에서도 실제 노동력이 투입된 적극적인 의미의 노동을 근로로 봐야 한다는 시각과 업무 관련 시간을 투자했으면 근로를 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혼재한다.

■퇴근 후 카톡에 가산임금…입증 어려워

신 의원실에서는 현재 근로기준법 56조(연장·야간 및 휴일근로)의 개정을 통해 시간외 근무수당을 부과하는 방법이 가능한지 검토 중이다. 근로기준법 56조는 연장근로와 야간근로, 또는 휴일근로에 대해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해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실무적으로 SNS 등을 통해 이루어진 근로에 대한 입증 어려움 등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고 밝혔다.

임금근로시간 개혁추진단 관계자는 “근로시간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고, 실제 근무한 것들을 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그때는 연장근로로 볼 수 있다”면서도 “근로자가 1시간을 일했는지 30분을 일했는지 확인하기 어렵고, 지시한 사람 입장에선 지시만 했을 뿐 굳이 집에서까지 하지 않아도 됐던 거라고 하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신 의원은 “개정안에 벌칙 조항이 없다는 지적을 일부에서 하는데, 모든 법에 벌칙 조항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디지털기기 발달로 근무환경 급격 변화…‘달라진 노동의 모습’ 사회적 논의 필요
<독일선 ‘노동 4.0’ 프로젝트 진행>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이 발의한 이른바 ‘업무시간 외 카카오톡 금지법’에 대한 직장인들의 뜨거운 호응은 많은 업무가 업무외 시간에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번 법안 발의를 계기로 디지털기기 발달 등 노동환경의 변화로 달라진 노동의 모습에 대해 근본적인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노동연구원 이경희 연구위원과 김기선 부연구위원이 지난 2월 발표한 ‘스마트기기 사용이 근로자의 일과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의 연구보고서를 보면 업무시간 외에 스마트기기를 사용한 시간은 평일엔 약 1시간20분, 휴일엔 1시간30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김기선 부연구위원은 29일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생활의) 디지털화가 근로시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고, 앞으로는 어느 곳에서 어느 때건 근로가 가능하게 됐다”며 “현행 1일 8시간이라는 근로시간이라는 체제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들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부연구위원은 “단순히 개인의 사생활 측면이 아니라 우리 사회 노동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할 것이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부연구위원은 “독일의 경우엔 산업혁신 프로젝트로 ‘인더스트리 4.0’(제4세대 산업생산 시스템) 시대에 대응하는 근로시간 등 노동 문제를 다루는 ‘노동 4.0’을 같이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는 올해 카톡 금지, 근무시간 외 업무연락 금지 같은 논의 정도에서 그치고 있지만 업무환경의 변화에 따라 훨씬 큰 본질적인 문제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기기들이 더 좋아지면 지금과 같은 사무실, 공장제 노동이 가능할 것인지, (작업장 노동이 사라질 경우)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에 대한 보호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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