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바다를 숭배하던 민초들, 불교를 만나 ‘구원의 순례길’ 찾다

2016.08.26 20:35 입력 2016.08.26 20:47 수정
글·사진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에도시대의 종교책자 <다카라 쓰카미토리>에 수록된 시코쿠 팔십팔개소 순례자의 모습.

에도시대의 종교책자 <다카라 쓰카미토리>에 수록된 시코쿠 팔십팔개소 순례자의 모습.

오늘은 기독교와 불교의 경전을 한 대목씩 읽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우선은 <마태오의 복음서> 9장.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진언종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는 홍법대사와 동행한다는 뜻의 ‘동행이인’ 삿갓을 쓴 오늘날의 일본인 순례자.

진언종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는 홍법대사와 동행한다는 뜻의 ‘동행이인’ 삿갓을 쓴 오늘날의 일본인 순례자.

다음은 아미타여래를 믿어 정토(淨土)로 왕생하고자 하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고승 신란(親鸞·1173~1263)이 남긴 <탄이초(歎異抄)> 제3장.

“선한 사람은 아미타여래의 힘에 전적으로 기대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여래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가 선하므로 왕생할 것이라는 마음을 고쳐먹어서 아미타여래에게만 의지한다면 정토로 왕생할 수 있다. 번뇌 많은 우리들 악인(惡人)은 무슨 짓을 해도 윤회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신 아미타여래께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원(願)을 세우심으로 우리는 구원받게 된다. 따라서, 아미타여래의 힘에 기대는 악인이야말로 왕생하게 되는 법이다.”

일본인들이 추앙하는 홍법대사 구카이.

일본인들이 추앙하는 홍법대사 구카이.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아픈 사람, 악한 사람이라고 한탄하는 사람이야말로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가련히 여겨짐을 받아서 구원받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깨달음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과 동쪽 끝에서 탄생한 크리스트교와 정토진종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이런 공통성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정토진종 신자들은 그 어떤 일본인들보다도 프로테스탄트적인 문화를 쉽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약하고 악하고 속된 존재가 성스러운 존재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역설은, 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원효는 진심으로 “나무아미타불”만 읊으면 정토로 갈 수 있다고 노래하며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복잡한 교리를 배울 지식과 시간이 없고, 탑을 세울 권력과 돈이 없으며, 먹고살기 위해서는 살생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피지배민들에게도 극락왕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가뭄의 단비 같은 가르침이었다. 원효와 비슷한 시기에 잇펜(一遍), 호넨(法然), 그리고 앞서 소개한 신란도 “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하며 거리를 헤맸다.

오쿠노인을 참배했다는 징표로 찍은 도장. 20세기 전기의 것이다.

오쿠노인을 참배했다는 징표로 찍은 도장. 20세기 전기의 것이다.

또, 예수가 실로암 연못에서 병자들을 치료해주었다는 <신약성경>의 묘사처럼, 일본에도 잇펜, 교키(行基), 구카이(空海) 같은 덕 높은 스님들이 온천을 찾아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주었다는 전설이 많이 보인다. 이들 고승은 한국의 원효, 의상, 도선 스님처럼 오늘날까지도 일본인들에게 친숙한 존재들이다.

그중에도 특히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일본인과 외국인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구카이다.

관음보살이 산다는 보타락산을 찾아 떠나는 ‘보타락 도해(補陀洛渡海)’ 수행 승려들이 탔던 배.

관음보살이 산다는 보타락산을 찾아 떠나는 ‘보타락 도해(補陀洛渡海)’ 수행 승려들이 탔던 배.

구카이는 밀교의 한 종파인 진언종(眞言宗)을 창시한 승려다. 사누키 우동으로 유명한 시코쿠 가가와현 지역에서 태어난 구카이는, 고향인 시코쿠를 비롯하여 각지의 영험한 산에서 수행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밀교를 배워 왔다. 귀국 후에는 밀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해서 홍법대사(弘法大師·고보다이시) 또는 ‘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그가 등신불(等身佛) 상태로 입적했다고 믿어지는 고야산(高野山) 오쿠노인(奧の院) 주변에는, 죽은 뒤에도 ‘대사’와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들의 무덤이 20만기 이상 세워졌다. 오쿠노인에는 임진왜란 말기인 1598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조·명 연합군에 승리한 시마즈 가문(島津家)이 세운 ‘고려 전쟁 때 전사한 적과 아군의 공양비(高麗陣敵味方戰死者供養碑)’라는 비석도 남아 있다. 부처 앞에서는 적도 아군도 마찬가지라는 취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적군을 죽였는지 과시하는 내용이다. 집안싸움 때문에 임진왜란에 늦게 참전한 것을 만회하고자, 일본 전국에서 참배객이 모이는 오쿠노인에 이런 비석을 세워서 선전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일본 전근대 시기 에도, 오사카, 교토 등 전국 대도시 순례길을 안내한 지도.

일본 전근대 시기 에도, 오사카, 교토 등 전국 대도시 순례길을 안내한 지도.

홍법대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신앙심은 고야산에 그치지 않고, 그가 태어나 수행한 시코쿠 일대로 확산되었다. 시코쿠에는 예로부터 바다 건너 저편을 숭배하는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뒤에는, 바다 건너 관음보살이 산다고 하는 보타락산(補陀落山)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보타락산 신앙이라 불리는 이러한 신앙 행위는 불교가 존재하는 지역에 널리 존재해서, 티베트에는 포탈라(Potala)궁, 중국에는 저장성 보타산(補陀島)의 조음동(潮音洞), 한국에는 낙산사(落山寺), 일본에는 보타락산사(補陀落山寺)가 있다. 일본에서는 이 보타락산을 찾아 배타고 남쪽 바다로 떠나는 ‘보타락 도해(補陀落渡海)’ 수행이 이루어졌다. 일본열도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사실상 수행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처럼 바다를 숭배하고 바닷가에서 수행하던 신앙 형태가, 어느 때부터인가 홍법대사를 본받아 시코쿠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는 ‘시코쿠 팔십팔개소(四國八十八箇所)’ 신앙으로 확립되었다. 순례자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홍법대사와 함께라는 뜻에서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고 적힌 삿갓을 쓴다.

홍법대사가 입적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야산의 오쿠노인 일대는 지금도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홍법대사가 입적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야산의 오쿠노인 일대는 지금도 참배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전근대 일본에는 시코쿠 팔십팔개소 순례 이외에도 서일본과 동일본에 걸쳐 산재한 100개소의 관음보살 영장 순례, 이세신궁을 참배하는 이세마이리(伊勢參り), 종교적 수행으로서 후지산을 답사하는 후지코(富士講) 등의 신앙이 존재했다.

시코쿠 팔십팔개소 순례가 여타 순례와 구분되는 점은, 무거운 병을 앓아서 죽음을 각오하고 참배하는 사람들, 그리고 죄를 저질러 갈 곳 잃은 사람들도 순례 행렬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돌아갈 곳 없는 이들 가운데에는 평생 순례를 하다가 길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었다. 순례 중에 죽은 이들의 무덤과 함께하는 시코쿠 팔십팔개소 순례는, 삶과 죽음, 성과 속, 신비함과 음울함이 공존하는 종교 행위였다.

한편, 전근대 시기의 일본인은 자신이 태어나고 생활하는 곳을 벗어나는 데 제약이 많았다. 시코쿠 팔십팔개소 순례를 비롯한 전근대 일본의 각종 순례는, 이들에게 먼 곳을 관광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한국으로 말하면 과거시험 보러 가는 길에 비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순례지 근처에는 여관과 가게, 사창가가 발달했고, 에도·오사카·교토 등 대도시에서 주요한 순례지까지 가는 길을 안내하는 책자가 현대의 고속도로 지도처럼 접히는 형태로 인쇄되어 히트하기도 했다.

이윽고, 순례길에 오르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마을 대표가 먼 곳의 성지를 방문해서 마을사람들 숫자만큼 부적을 받아오거나, 대신 참배해주면 본인이 간 것과 똑같은 효과가 있다고 믿어지는 전문적인 종교인이 등장했다. 한편으로는, 먼 지방의 순례지를 자기가 사는 지역 주변에 조성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도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무슨 무슨 후지산”이니 “무슨 무슨 팔십팔개소”니 하는 소규모 종교 시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조선왕조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인들은, 본국에서 하던 대로 한반도 곳곳에 소규모 종교 시설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조성된 것이 팔십팔개소 순례지였다. 한반도에서 가장 처음 팔십팔개소가 조성된 곳은 부산이었고, 인천·마산·목포·군산, 함경북도 청진·경성 등지에도 조성되었음이 확인된다.

한반도에 조성된 팔십팔개소에 대해서는 기존에도 연구가 없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에는 근거 자료가 부족한 추정이나 호사가들의 공론에 그친다. 그러다가 올해 2월, 인천 지역의 도시 공간 연구를 이끄는 재능대 손장원 교수가 인천 팔십팔개소의 위치와 연혁을 고증했다. 그 보고서가 학술지 ‘인천학 연구’ 24호에 실린 ‘인천 신사국 팔십팔 영장(仁川新四國八十八靈場) 연구’다.

필자는 지난 7월27일 손장원 선생과 함께 인천 동구 송림동의 소위 ‘부처산’에 조성된 시코쿠 팔십팔개소 영장의 옛 조성 흔적을 답사했다. 일본이 패망한 뒤, 서울 용산의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터에 해방촌이 조성되었듯이, 부처산 공터에도 월남민들이 정착했다. 그러나, 경성호국신사의 흔적은 108계단으로 남아 있지만, 인천의 시코쿠 팔십팔개소 영장은 한국전쟁 후에 재능고등학교, 박문여자중·고등학교, 선인재단 계열 학교들이 부처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순례라는 성스러운 행위와 식민 통치라는 속된 행위가 한때 한반도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그 공존의 역사에 관한 증거를 없앰으로써 역사를 지울 것인가, 그 역사를 기록하여 기억할 것인가. 현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성숙했고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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