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장정일 “지식인 잡지들이 빠진 ‘성맹’, 탈출에 고심”

2016.09.11 21:38 입력 2016.09.12 10:55 수정

‘언론 인터뷰 사절’ 선언했던 장정일 ‘말과활’ 주간 맡아 최신호 내고 인터뷰

계간 ‘말과활’ 주간인 장정일 작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서구 담론이 지배적인 한국 풍토를 바꿔놓고 싶다”고 밝혔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계간 ‘말과활’ 주간인 장정일 작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서구 담론이 지배적인 한국 풍토를 바꿔놓고 싶다”고 밝혔다.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문제적 작가 장정일이 잡지의 편집장으로 변신했다.

수년간 작품활동은 거의 않고 서평과 칼럼만을 써오던 그가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 주간을 맡아 지난주 최신호(11호)를 펴냈다. 지난 5월 문부식 주간의 뒤를 이은 그는 편집위원 절반을 여성으로 꾸려 독립적으로 기획을 하고, 격월간을 계간으로 바꾸는 등 쇄신을 단행했다.

지난 9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장정일을 만났다. ‘마흔아홉 살’을 기점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그다. 그러나 30여명의 글이 빼곡히 실린 잡지 한 권이 그를 약속장소로 나오게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그동안 서평과 칼럼 이외에는 외부 노출을 꺼려왔는데, ‘말과활’ 주간을 맡은 배경은.

“인생에 한번은 잡지를 하리라는 생각을 해왔다. 물론 책이나 서평 관련 잡지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예전 ‘상상’이라는 잡지의 편집위원을 맡은 적이 있지만 첫 편집회의를 하던 날 검찰청에 끌려갔고 그날 바로 구속됐다. 아쉬웠다. 지난해부터 ‘말과활’에 ‘사회적 독서’를 하러 들락거리고, 9호와 10호 필자로 참여하면서 잡지를 자세히 보게 됐다. 뭔가 주인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먼저 주간 제의를 했다.”

- ‘말과활’ 쇄신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지식인 잡지 대다수가 빠져있는 ‘성맹(性盲)’을 탈출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한국 계간지들은 여성 편집위원 몫이 지나치게 적거나 형식적이다. 비판적 지식계를 대표해 온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사회’는 남성지식인을 위한 ‘지큐(GQ)’ 혹은 ‘맥심(MAXIM)’과 다를 게 없다. 우리 잡지가 그 고민을 시작했으니 다른 잡지들도 바뀌지 않을까.”

그는 여성·남성 편집위원회를 별도로 구성, 각각 독립적 편집권을 부여했다. 이번 ‘말과활’의 커버스토리는 여성편집위원회 기획인 ‘혐오의 정치를 넘어서’다. 김신현경, 허윤, 오경미, 류진희가 글을 쓰고 낸시 프레이저의 ‘컨텍스트와 액션’ 인터뷰를 실었다. 남성편집위원회 기획인 ‘우리안의 난민’을 ‘투톱’ 기획으로 올리려 했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글들을 떨궈내면서” 실패했다고 한다.

애초엔 한 잡지 안에 두 개의 책을 만들려 했다. 잡지 앞뒤에 각각 표지를 만들어 앞에서부터 보면 여성편집위의 글이, 뒤에서 보면 남성편집위의 글이 시작되도록 한 것이다. 독일의 잡지 ‘논쟁’(Das Argument)을 참고로 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부 편집위원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장정일 “지식인 잡지들이 빠진 ‘성맹’, 탈출에 고심”

- 머리말에서 현 시대를 ‘도망간 노예를 잡아들이는 시간’으로 진단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비슷한 상황이다. 모더니티의 한 축이었던 식민화가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근대화는 식민의 방향을 내부로 돌렸다. 지금은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 여성, 청년, 이민노동자 등 200년 넘게 도망(해방)을 엿봐온 노예를 다시 잡아들이는 시간이다.”

- 잡지 주간으로서 향후 중점을 두고 싶은 부분은.

“ ‘시간의 틈’을 노리는 기획으로 승부하려고 한다. 주류가 아닌 잡지들의 살길은 두 가지다. 주류 잡지가 못하는 이슈로 기획을 하거나, 앞을 미리 내다보는 ‘시간차’ 기획을 하는 것이다. 후자가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잡지가 살 수 있는 길이다. 다루는 이슈를 일본, 아시아의 담론까지 넓혀보고 싶다. 서구 담론이 지배적인 한국 풍토를 바꿔놓고 싶다.”

1980년대 중반, 논란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와 소설로 이름을 알렸던 장정일은 언젠가부터 문학을 뒤로하고 ‘서평가’로서의 정체성을 굳히고 있다. “프로페셔널한 서평가가 없는 것 같아서다. 서평가로서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 테리 이글턴이다. ‘와 이렇게 한번 써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테리 이글턴이 나오기 힘들다. 글 한 편에 200만원을 주는 가디언 같은 언론사도, 서양처럼 발전된 서머리 산업도 없기 때문이다.”

- 장정일이 ‘외로운 독학자’에서 ‘기득권 헤게모니’편에 서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도 난 동료가 없고, 동료 만들기에 관심이 없다. 하려고 한다해도 안될 것이다. 학연과 지연, ‘끈’이 있어야 친구가 된다. 다만 후회는 조금 된다. 주간을 맡고 나선 칼럼에 ‘내 마음대로’ 글을 쓰지 못하겠는 거다. 더 이상 자유롭진 못하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 문제적 작가 ‘장정일’에 비해 잡지는 진중한데.

“(웃음) 나에 대한 오해다. 난 엄청 상식적인 사람이다. 캐릭터만 강할 뿐 독특하거나 별난 사람이 아니다. 튀는 부분마저 다른 책에 있는 말들을 인용했던 것뿐이다.”

장정일이 문학과 아예 척을 진 것은 아니었다. 내년에 민음사에서 26년 만에 새 시집을 낼 계획이다. 12편을 써놓았으니 28편만 더 쓰면 된다고 한다. 다음달 문학잡지 ‘릿터’에도 새 시 2편을 발표할 예정이다.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언론의 모든 기고가 끝나면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시, 소설, 희곡을 다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읽음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