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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1 20:54 입력 2016.10.31 20:56 수정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매트릭스

역사든 현실이든 음모론이나 궁중비화식 서술은 해악이 있다. 극소수 엘리트 영역을 위주로,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인 심리와 윤리 차원으로 상황을 단순화함으로써 대다수 인민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의 총체성을 소거하기 때문이다. 최순실 사태는 음모론과 궁중비화식 서술에 대한 그런 일반적 판단을 무색하게 한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악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이 사태는 박근혜나 최순실 따위 지극히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행태가 될수록 안전하다. 이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이 입에 올리는 ‘국정농단’이라는 말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국정을 농단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하여 그 결과가 정반대의 가치로, 친노동자·서민적 정책으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정체가 드러난 최순실은 ‘의적’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국정 운영의 합리성보다 중요한 건 사회에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어떤 계급의 이해에 기여하는가다.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매트릭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지배계급은 온 나라가 한목소리로 ‘국정농단’을 외치도록 함으로써, 자신들도 똑같은 피해자가 되어 상황을 빠져나간다.

분노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고, 퇴진 여부와 관련 없이 박근혜가 기존의 권력을 회복하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에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박근혜의 무력화는 지배계급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지배계급이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변혁적 사회 변화는 사회적 분노가 다른 세상의 전망과 결합할 때 만들어진다. 분노는 내 밖의 것들에 대한 반응이지만, 전망은 내 안에서 진행하는 엄격한 지적 활동이다. 분노와 전망의 결합이야말로 공화국 시민의 요건이자 표징이다.

이번 사태로 분노는 혁명 전야 수준까지 올랐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쇠락을 비롯해 이미 미약해질 대로 미약해진 다른 세상의 전망이 그에 걸맞게 저절로 생겨난 건 아니다. 전망이 ‘박근혜 없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배계급은 이 소란 속에서도 ‘선수 교체’만으로 모든 걸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지배계급의 2중대인 민주당도 당장은 욕을 먹고 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정권 교체’의 깃발 아래 다들 돌아올 거라 확신한다.

다른 세상의 전망에는 여러 차원과 갈래가 있다. 학자나 이론가의 역할도 있고 활동가의 실천도 있다. 그걸 기반으로 인민의 보편적 사회의식과 식견이 형성되고, 도달 가능한 사회의 수준과 상이 도출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전제는 지금 현실의 구조와 본질을 정확하게 보는 일이다. 그게 없다면 전망이나 대안은 초점을 잃고 해소되거나 기존 체제의 존속에 봉사하게 된다. 분노의 양은 부차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손석희 뉴스를 어떻게 보는가’는 의미 있는 질문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지배계급의 핵심 중 하나인 홍석현 그룹은 왜 사실 왜곡과 극우적 선전 선동이라는 기존 우파 언론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자그마치 한국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뉴스’를 만들었는가. 여기에 대해선 좀 더 자세하고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흔히 ‘수구 꼴통’이라 통칭되는 지배계급이 그 내부로부터 매우 빠르게 혁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혁신 그룹은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기존의 방식이 인민의 진전된 시민의식과 이념 성향으로 볼 때 한계에 봉착했음을 간파하고, 영리하게도 손석희라는 신망 높은 중도 우파 언론인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런 선택이 종편 사업의 사업적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일뿐더러, 지배계급의 습속에 어색할 뿐 지배계급의 이해를 거스르진 않는다는 걸 안다. 손석희씨 또한 독립적 권한을 가지고 소신대로 뉴스를 만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공공적 성격을 가진 방송과 상업주의적 목적의 방송(종편)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언론운동의 틀은 박살이 났다. 그리고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손석희 뉴스의 중도 우파적 양식과 매력이 보다 급진적 관점의 존재 의미를 잊게 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세련되고 교양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요컨대 손석희 뉴스의 애정어린 시청자들은 이건희 성매매 사건을 다루는 손석희에 거듭 신뢰를 보내면서, 이재용의 등기이사 선임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은 손석희를 관용하는 것이다.

손석희 뉴스는 오늘 자본의 권능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홍석현 그룹은 최선의 상업주의적인 뉴스를 기획했던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뉴스’다. 지상파 뉴스가 심각하게 반동화한 상태에서 손석희 뉴스의 미덕과 유익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전면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관점과 통찰을 잃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의 분노에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배계급은 이제 맞춤식으로, 한편으로 극우적 선동으로 한편으로 정의와 공정성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지도하며 다음 세상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매트릭스의 어디쯤에 있으며,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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