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적 명예혁명

2016.11.14 20:44 입력 2016.11.14 21:45 수정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첫째, 이것은 ‘딜(협약)에 의한 재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딜에 의한 민주화’는 민주화이행론에서 민주화의 방식들중 하나다.
 1987년 6월항쟁은 대중봉기가 주도했고, 재야를 매개로 느슨하게 이어진 보수 자유주의 세력이 노태우 집권당 대선후보의 ‘6.29선언’에 합의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아니 찍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제도정치권 그들 사이의 ‘민주화 딜’은 이뤄졌다. 다음달 터져나온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다면 그 딜은 온전했거나, 아니 좀 밋밋했을 것이다.

[세상읽기]예방적 명예혁명

 그럼 지금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도 딜로 끝날 것이다. 헌정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이뤄지는 재민주화. 이명박·박근혜 우파정권이 농단하고 훼손시킨 민주주의의 회복, 헌정질서로의 복귀. 이 목표에 대해서 보수파들, 심지어 일부 극우파까지도 동의한다. 그들은 이전에도 헌법은 ‘사문서’화되고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은 모른 척한다. 노동자의 3권을 보장한 것도 헌법이고,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한 것도 헌법인데, 그렇게 정치적 권리, 시민적 자유들이 훼손될 때 모른 척하다가, 아니 심지어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 헌법적 권리를 봉쇄하다가, 이제 권력 엘리트 내 이너서클의 ‘국정 개입’과 ‘농단’에 대해선 분개해마지 않으면서 헌법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대통령의 하야도, 퇴진도, ‘헌정의 중단’이 아니라는 신종 헌법 해석들이 지식인들에 의해서 쏟아진다. 대체로 동의한다.

 근데 왜 이것을 이전엔 몰랐을까? 왜 이전엔 헌법에 대한 이런 적극적이고 주권론적인 해석을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질문을 바꿔서 왜 지금은 헌법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할까?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하기 때문이지. 아니면 대통령을 민중의 힘으로, 대중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불상사는 막아야 하기 때문이지. 주권자가 법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지. 주권자가 법 안에서 움직이게 해야 하기 때문이지. 법을 새로 쓸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인 인민주권을 법에 의해서 제한해야하기 때문이지. 그건 결국 기득권세력에게 위협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두번째 정의. 대통령은 내려와야한다. 그러나 질서있게 ‘선제적’으로, ‘예방적’으로. 대중봉기에 대해 선제적으로, 혁명 혹은 혁신적인 기운에 대해 예방적으로. 똑같이 대통령이 끌어내려져도 다음 상황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명예혁명’이다. 일부에서 그렇게 규정하던데, 그것은 맞는 말이다. 단지 한마디 더 붙이면, 이것은 선제적, 예방적 명예혁명이다. 명예혁명의 본산인 영국의 역사를 보면, 당시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봤던 의회와 정당을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를 유일 민주주의로 만들었던 전환점, 혹은 완성이 바로 명예혁명이었다. 귀족 토지계급과 신흥 브르조아지가 ‘피흘리지 않고’ 권력분점을 교섭한 결과, 프랑스처럼 왕을 단두대로 보내 처단하지 않고 가능했던 민주화 말이다.

 한국에서 이번 박근혜 게이트의 정치적 해법을 두고 ‘명예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기묘하고 흥미로운 비유다. 그리고 참 솔직한 비유다. 대통령은 끌어내리되, 피흘리지 않고, 폭력 쓰지 않고, 헌법을 훼손하지 않고 (즉 그 말은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체제를 훼손하지 않고), 다른 것 보태지 말고, 권력의 정점만 바꾸는 것. 이 민주주의는 그렇게 민주주의 딜을 통한 재민주화, 선제적 예방적 명예혁명, 87년체제의 연장선으로 회귀할 것이다.

 좋다. 그게 ‘질서’를 선호하는 대중이 원하는 바라고 해두자. 박정희의 환상을 끝장내는 것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미련은 남는다. 그래서 바뀌는 것은 무엇일까? 헌법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킬 것이다. 근데 그것은 곧 지난 30년간 경험해왔던 그 민주주의일 것이다. 비선실세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던 검찰기구는 지금 칼자루를 쥐고, 주인을 바꾸면서 정작 자신의 권력은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과연 누가 진짜 권력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폭력적 경찰기구는 굳건히 자리잡아 다음 정권이 누가 되더라도 그 폭력성을 유지할 것이고 어쩌다 우리는 백남기 노인 같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이의 죽음을 보게 될 것이다. 미르재단과 K재단에는 수백억원 돈다발을 보험삼아 보내면서, 자신의 공장에서 픽픽 쓰러져간 노동자들은 모르쇠한 재벌, 비정규직을 정규직처럼 부려먹은 재벌, 그러면서 이제와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자본권력도 의연할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발을 빼고 이 모든 게이트를 폭로하고 나선, 그러나 이전엔 권력에 부역했던, 민주주의의 파괴에 침묵했던 언론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게 권력의 머리만 치고, 체제의 부역자들 아니 공범은 살아남아 이 체제의 견고함을 증명해줄 것이다. 우리는 다시 87년 헌법질서로 돌아간다. 그 체제는 노동배제의 민주주의였고,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였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정보기관과 검찰과 경찰기구가 인권과 시민권을 밟는 폭력국가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근혜와 최순실을 만들어낸 정치적 질서다. 여기에는 하나의 최순실이 아니라 수많은 최순실들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앙샹 레짐’(구체제)인가? 마리 앙투아네트만 단두대로 보내면 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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