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불립(無信不立), 퇴임식서 청와대 향해 속내 밝힌 법무장관

2016.11.29 17:26 입력 2016.12.01 19:42 수정

김현웅 전 법무부 장관(57)은 29일에도 평소처럼 정부과천청사 1동 법무부 장관실로 출근했다. 하지만 이날 오전 10시부터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는 이창재 법무부 차관(51)이 자리를 지켰다. 이날 김 전 장관의 이임식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임식은 오후 2시이지만, 사의가 수리돼 이날 0시부로 공식적으로는 장관직을 수행하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1년 5개월동안 자리를 지켰지만 존재감은 옅었던 김현웅 장관의 마지막날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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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이임식을 마친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과천 법무부 청사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정지윤 기자

29일 이임식을 마친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과천 법무부 청사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정지윤 기자

오전 11시가 채 안됐을쯤 김 전 장관은 법무부 국·실장들을 장관실로 불러모았다. 이임식 전 격려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오찬’도 함께하자는 뜻을 전했다. 이날 법무부 직원들과 일일이 만나 인사하는 시간은 별도로 없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2시, 법무부 지하1층 대강당. 10분전부터 자리를 메운 직원들 사이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1년 5개월동안 법무행정을 발전시킨 김현웅 장관님을 보내드리는 날입니다. 마음같아서는 축제의 장으로 행사를 치르고 싶지만 국가적으로 매우 엄중한 상황이라 이임식 행사는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습니다.” 낮은 목소리의 웅성거림마저 잦아들었다.

김 전 장관이 대강당을 가르지르는 통로를 통해 등장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앞주머니에 꽃이 꽂힌 검은 양복재킷에 파란 넥타이를 맸다. 맨 앞줄에 부인과 함께 앉은 김 전 장관의 ‘고별 영상’이 상영됐다. ‘바른생활 사나이’ ‘키다리 아저씨’ 같은 표현들이 등장했다. 영상 속 한 간부가 “장관님이 자신에게는 특별한 장기가 없지만 다만 화를 잘 안내는 것이 장기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온화’ ‘따뜻함’ 같은 단어가 영상 속을 지나갔다.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29일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29일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마친 뒤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정지윤 기자

김 전 장관은 지난해 7월 64대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1997년 김종구 법무부 장관 이후 18년만에 서울고검장에서 바로 장관직에 오르는 사례였다. 호남(전남 고흥) 출신은 지역 안배라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고, 현직 고검장이라는 신분은 ‘전관 예우’ 논란을 피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으로 법조비리 수사를 지휘했다. 당시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법조인들과 경찰 간부들이 기소됐다. 이 이력은 그에게 “특수수사 경험이 있어 사정당국 지휘에도 적합하다”는 평가를 안겨줬다. 아이러니하게 지난 6월 ‘진경준 게이트’로 불거진 검찰 비리에 대해 대중앞에서 고개를 숙인 것도 그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관으로서 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고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았던 민중총궐기 전후로 “폭력집회 배후를 끝까지 추적하고 엄벌하겠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종교의 방패 뒤에서 걸어나와라” 같은 담화문을 낭독했다. 물론 이런 말들이 그의 소신이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을 ‘대독(代讀)’한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첫 법무부 차관으로서 황교안 당시 장관을 보좌했던 이력, 지난해 7월 본인의 장관 인사청문회 때도 전임 황교안 장관의 청문회 때와 비슷한 답변을 했던 전력도 이런 생각들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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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장관과 부인 이상미씨(54)가 단상에 올라 재임기념패, 송별의 글 모음집, 꽃다발을 받았다. 이윽고 김 장관은 이임사에서 “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의 자세로 … 쉼 없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민무신불립은 ‘윗사람이 신임을 받지 못하면 아랫 사람이 떨어져나간다’는 뜻이다. 이임식 내내 강조되던 ‘현 시국의 엄중함’과 무관치 않은 말이었다. 그는 “최근 일련의 사태로 인해 심각한 국정혼란 상황이 지속되어 국민들께서 크게 걱정을 하고 계신다”며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무엇이 올바르고 더 나은 길인지 심사숙고한 끝에 사직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지금의 상황에서 사직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디”며 사의를 표명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9일 이임식을 마친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과천 법무부 청사를 떠나고 있다. 정지윤 기자

29일 이임식을 마친 김현웅 법무부장관이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과천 법무부 청사를 떠나고 있다. 정지윤 기자

들어올 때처럼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장한 김 전 장관의 마지막 일정은 기념촬영 행사였다. 법무부 건물 앞 계단에 검찰 검사장들과 사무국장, 법무부 4급 이상 간부들과 소속 기관장들이 계단 위에 서 촬영 대형을 만들었다. 계단 맨 아래인 앞줄에 비워놓은 자리에 김 전 장관 부부가 섰다. 엄숙했던 이임식 분위기 때문일까.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시간 누군가 핸드폰으로 켜놓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낭독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기념촬영이 끝나자 옆에서 대기하던 김 전 장관의 차가 빠르게 계단 앞에 멈춰섰다. 기자 10여명이 닫히려는 승용차 뒷문을 붙잡았다.

- 청와대로부터 물러나라는 지시 있었어요?

“출발하겠습니다.”

- 소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이임사에서 말씀드렸습니다”

- 다음 장관 없는 상황에서 이임식 하셨는데 심경이 어떠신가요.

“이임사에서 이미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임사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 왜 물러나시는지 아직도 많이 궁금해 하거든요.

“…”

문이 닫혔고 차는 떠났다. 김 전 장관은 “이임사를 참고하라”고 했다. 기자들 사이에는 그가 인용한 ‘민무신불립’이란 말이 다시 오고 갔다. ‘윗사람이 신임을 받지 못하면 아랫 사람이 떨어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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