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이런 무죄라니, 박유하의 경우

2017.02.13 15:55 입력 2017.02.13 19:43 수정
이범준 기자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명예훼손혐의를 받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법원을 나서며 미소를 짓고 있다. 연합뉴스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명예훼손혐의를 받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법원을 나서며 미소를 짓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평양에서 7차 노동당 대회를 취재 중이던 영국 BBC 기자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 대한 무례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3일간 억류됐다. 이 무렵 일본 산케이신문 기자도 박근혜 대통령에 관한 기사 때문에 8개월 동안 억류됐다. 명예훼손과 출국금지라는 법률용어를 썼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명예훼손, 이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치권력이 부당하게 사용하는 탓이다. 정권들은 권력 감시를 개인 공격으로 몰아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형사처벌을 시도한다. 하지만 명예훼손 죄책을 따져묻는 것은 악이 아니다. 명예훼손은 헌법이 보장한 인격권의 침해이며, 인격권은 표현의 자유 못지않은 기본권이다.

언론(저술)의 명예훼손은 어디에서나 위법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엄중한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 수십억원의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일도 허다하다. 독일과 프랑스라면 손해배상에 더해 형사범으로 처벌된다. 다만 공익 목적이고 진실이면 책임을 벗는다. 진실 발견을 위해서만 인격 보호가 양보된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에 대한 1심 재판들이 끝났다.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한 민사·형사다. 우선 2015년 민사법원이 책에 대한 삭제요구를 인용했고, 2016년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했다. 지난달 형사법원이 명예훼손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박 교수는 “현명한 판결”이라고 했다.

문제의 그 책도, 이를 반박한 책도 거듭해서 읽은 나는 무죄 판결문을 구했다. 명예훼손을 인정한 2개의 민사 판결을 어떻게 돌파했을지 궁금했다. 피해자가 살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어디까지 기술할 수 있는지 재판부는 치열하게 논증했을 터였다. 미국, 유럽, 유엔이 관여한 세기의 사건이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세계의 재판이다.

사회부|이범준

사회부|이범준

판결문은 눈을 의심케 했다. 이렇다 할 논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서술은 사실(fact)과 의견(opinion)으로 나뉜다. 사실은 진실(truth)과 허위(false)로 갈린다. 명예훼손은 사실, 주로 허위를 적시한 경우에 해당된다. 의견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실과 의견이 뒤섞인 경우가 허다하고, 그래서 판사는 사례를 공부하고 판례를 연구한다.

앞서 2개의 민사사건은 뜨거웠다. 2015년 삭제요구 사건에서 민사법원은 34곳에서 (허위) 사실적시와 명예훼손이 있다고 했다. 2016년 손배해상 사건에서도 같은 작업을 거쳐 명예훼손과 인격권 침해를 인정했다. 형사사건은 이미 인정된 34곳을 포함해 35곳의 명예훼손을 다퉜다. 그런데 재판부는 30곳이 단순 의견이라고 했다. 논증은 하지 않았다.

이상윤 재판부는 35곳의 표현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가리지도 않았고, 역사 기술의 한계를 밝히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었다. “불명료한 개념이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표현, 전후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서술 등이 다수 발견되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중략) 피해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평가에 유의미할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다.”

거칠게 말하면, 박 교수의 조악한 연구와 난삽한 표현 때문에 명예훼손을 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급한 일반화, 과도한 비약, 논리적 오류” 같은 학계의 평가도 재판부는 인용했다. 이렇게도 간단한 판결로 역사적 분쟁이 정리된 것일까.

“명예를 보호해주리라는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의사형성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는 개인 등의 전유물이 될 위험이 있다.” 법과대학 헌법교과서의 ‘표현의 자유’ 해설이다. 결론에 한 줄 무죄만 적는다고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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