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복의 인물탐구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한상균, 이석기는 대표적 양심수"

2017.04.29 15:28 입력 2017.07.31 15:47 수정
글 원희복 선임기자 ·사진 이상훈 선임기자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이상훈 선임기자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이상훈 선임기자

| 원희복의 인물탐구 |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권오헌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정기집회 중 널리 알려진 것이 정신대대책협의회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는 수요집회다. 수요집회는 1992년 1월부터 시작해 최장기 집회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집회가 바로 목요집회다. 매주 목요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주최로 열리는 목요집회는 1993년 9월 23일부터 시작됐다. 목요집회의 전신격이랄 수 있는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주최한 목요기도회는 1974년 7월 18일부터 시작됐으니 사실상 수요집회보다 훨씬 역사가 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보라색 머플러를 두르고 이어진 목요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80)이다. 말 그대로 노익장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관찰’에 따르면 “체구·외모, 단순·소박·검소한 생활, 진솔성, 투지와 의지, 보잘 것 없는 학력(특수학교 중퇴인 호찌민이나 초등학교 졸업인 권오헌 선생은 학위가 없다는 점에서 일치) 등등에서 이 별명(호찌민)은 너무나 권오헌다웠다”고 말했다. 호찌민은 바로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집회에 빠지지 않는 ‘한국의 호찌민’

비단 이 목요집회뿐 아니다. 웬만한 민주화·통일 집회에 권 선생은 빠지지 않는다. 과거 재야운동이나 지금 민주화·통일운동을 좀 하는 사람 치고 그의 얼굴을 모르면 ‘간첩’이다. 그는 70년대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결성과 유신 반대에 나선 이래 국가보안법 폐지, 비전향장기수 송환 추진, 미군범죄 진상규명, 이라크 파병 반대, 송두율 교수 석방운동 단체 등의 대표를 맡았다. 심지어 용산 철거 범국민대책위, 천안함 사건 진상규명, 제주해군기지 건설 저지 등 ‘시위현장’에는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비교적 최근인 박근혜 정부에서는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개악 저지 활동,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진상규명,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 사드 배치 반대 전국대책위를 거쳐 이번 촛불혁명 국면에서 국민행동 공동대표로 탄핵의 최일선을 지켰다.

권 선생의 ‘본업’은 양심수 후원활동이지만, 실제 활동은 재야·민주화·통일 등 전 분야에 망라돼 있다. 그의 활동만 모으면 우리나라 민주화·통일운동사가 그대로 정리될 정도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개인적 삶에 대한 소개나 언론에서의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그는 먼저 ‘양심수’라는 단어의 기원부터 설명했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정치범이라는 표현을 썼다. 군부독재 시대를 거쳐오며 양심수라는 말이 생기고, 특히 유신시대 국가보안법이 많은 양심수를 양산했다. 1987년 6·10 시민혁명으로 노태우 항복을 받고 1988년 잠시 ‘양심수 전원 석방’ 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270여명의 비전향장기수, 전쟁포로, 빨치산, 남파간첩 등은 그대로 있었다. 이때 이들을 후원하기 위한 ‘장기구금 양심수 석방을 위한 후원회’(양심수후원회)를 만들었다. 당시 만든 양심수의 규정은 ‘조국 하나 되기 위해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킨 사람들’이다.”

문익환 목사와 김승훈 신부가 양심수후원회를 주동하고, 권 선생이 실무를 맡았다. 김영삼(YS) 정권에서는 비전향장기수를 석방, 북으로 송환하고 ‘더 이상 양심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주장이 허구임을 알리기 위해 구속자 가족들이 시작한 것이 바로 목요집회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비록 국가보안법 기소는 줄었지만 여전히 양심수는 존재했다. 목요집회가 그치지 않고 이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수감돼 있는 양심수는 얼마나 되나.
“박근혜 정권에서 다시 국가보안법 적용이 늘어났다. 현재 50여명의 양심수가 있는데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고, 나머지는 민중총궐기에 나섰던 노동자와 노점상들이다.”

그 중 우선 석방해야 할 주요 양심수를 꼽는다면.
“내란음모사건의 이석기 전 의원이다. 내란음모가 무죄인데 내란선동 유죄는 말이 안 된다.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는 입건사안도 안 되는 것으로 명백히 정치적 보복이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역시 전형적인 양심수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2017년 촛불혁명은 4·19 학생혁명, 6·10 시민혁명을 능가하는 민중혁명이다.

“그렇다. 촛불은 집권자를 내쫓고 구속까지 시킨 혁명적 사건이다. 프랑스 혁명도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해 수감자를 석방하는 것으로 상징되고,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해방을 맞았다. 4·19혁명 후 정치범 석방, 87년 6·10항쟁을 통해 양심수 대폭 석방이 있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양심수 석방 문제가 제기돼야 한다. 그런데 국민들은 물론 대권주자들도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권 선생은 “양심수 문제에 대해 이번 촛불혁명의 최고 집행부인 ‘박근혜 퇴진 비상행동위원회’에서 여러 번 발언했지만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촛불혁명에 이슈화되지 못했다”면서 “비상행동에 포함된 3000개 단체 중 민중·민주그룹은 적극적으로 양심수 문제를 제기하는데, 시민·사회단체는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민주노총·전농·전교조 등과 민중·통일단체가 시작한 민중총궐기에 다양한 시민·사회단체가 추가로 가세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지도부의 ‘전략적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이번 촛불혁명의 진실을 기록하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해야 한다. 화제는 양심수를 양산하는 국가보안법 문제로 옮겨갔다. 국가보안법은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미국 대표가 개정하라고 권고했던 법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과거 우리 대선 때 공약으로 나왔다.

“과거 YS는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공약했고, DJ는 가칭 ‘민주수호법’으로 대체입법하겠다고 오히려 소극적 공약을 했다. 그러나 YS는 대통령이 되어 그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이번 대선주자 중 문재인 후보는 TV토론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는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민가협과 양심수후원회를 비롯한 민주·통일단체들은 이번 대권주자들에게 양심수 석방,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해 의견을 전달했다. 그나마 문 후보가 입장을 보인 것이다. 2004년 민가협을 비롯한 여러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1년 동안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해 어렵게 폐기법안까지 발의했지만 처리하지 못했다. 그때 노무현 정부는 국회 경호권을 발동해서라도 상정해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국가보안법 기소 줄어도 양심수는 여전

이미 십수 년 전 경쟁적으로 폐지 공약을 했던 사안이 지금은 일부 조항 수정을 주장하는 후보가 존재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권수준이 ‘역행’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양심수후원회원은 1000여명, 많을 때는 1300명까지 됐다. 후원회원들은 민주화운동 가족, 야권 정치인도 많지만 주부와 학생 등 다양하다. 후원회는 양심수 50여명에게 매달 2만원씩의 영치금을 지원하고, 정기적 면회와 편지쓰기 등을 하고 있다.

권 선생이 가장 기억에 남는 양심수는 이인모씨다. 북한 인민군 종군기자였다가 체포된 이인모씨는 남으로 전향을 거부해 34년간 비전향장기수로 남았다. 그는 양심수와 남북갈등의 상징이었고, YS는 1993년 그를 석방해 북으로 송환했다. 권 선생은 비전향장기수 북한 송환 추진위 공동상임위원장으로 2000년 9월 비전향장기수 63명을 고향에 보내는 작업을 추진했다.

권 선생은 1937년 충남 홍성 태생이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 권 선생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을 꼽았다. 한 사람은 자신보다 11살 많은 작은누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정모 담임선생님이다. 그는 이 두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고 고백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목요집회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 양심수후원회 제공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탑골공원에서 열리는 목요집회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 양심수후원회 제공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는 여기저기서 책을 구해 공부했다. 그는 50년대 후반 고향에서 농촌청소년운동(4H)을 했고, 이것은 후에 새마을운동으로 구체화됐다. 나이가 들어 준교사 자격시험을 보려고 공부했지만 영어와 수학에 막혀 포기했다. 그는 영어를 군대에서 배웠다고 했다.

권 선생은 64년 충북 단양에 있는 시멘트공장에서 장비기사로 일했다. 그는 “험한 노동일을 하면서도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썼다”면서 “이 기간은 자신을 무겁고 뜨겁게 학대했던 때”라고 기억했다. 그때 공장에서 만난 사람이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해직돼 시골로 내려온 박모 교수다. 박 교수는 시멘트공장에서 일하던 권오헌을 보고 ‘이곳에서 썩기 아까운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시 서울에서 진보정당 작업을 하던 김철(김한길 전 의원의 부친)을 소개했다.

■공장에서 일하다 교수 눈에 띄어 서울로

단양시멘트 공장에서 9개월간 성숙기간을 거친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김철 선생과 진보정당 재건에 나서면서 한편으로 함석헌·장준하 선생의 강연을 들으며 보다 넓은 세상을 봤다. 특히 그는 1973년 김철과 함께 통일사회당 정강정책 작성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양호민(조선일보·사상계) 천관우(동아일보) 박현채(경제평론가·조선대) 등 당대의 이론가들과 접촉했다. 게다가 문학에 관심이 있던 그는 구중서(가톨릭신문·수원대 교수)·염무웅(창작과 비평·영남대 교수)·임헌영(경향신문·현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젊은 진보적 기자·작가와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그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었지만 당대 권위 있는 진보적 지식인들과 당당히 교류한 것이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권 선생의 고희 문집 <인권을 다지며 자주통일로>에 쓴 축하글에서 “60년대 후반기부터 분신처럼 지낸 권오헌…. 뭐가 그리 죽이 맞았던지 항상 어울려 민주화운동권과 문단, 지식인, 통일운동가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다”면서 “어떤 시사담론이나 당면한 쟁점에서도 토론과 사전 협의 없이 의견이 일치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와 교류하던 진보적 기자·작가 상당수는 유신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였다. 임헌영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고 권 선생도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됐다. 남민전 사건이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도시게릴라 조직으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유신말기 최대 공안사건이다. 그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같이 엮인 인물은 임헌영(경향신문 기자)을 비롯해 김남주(시인) 홍세화(당시 회사원·현 노동당 대표) 이재오(늘푸른 한국당 대표로 이번 대선 출마) 등이다. 이 남민전 사건 연루자 29명은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판정을 받았다.

권 선생은 1983년 감옥에서 나와 ‘장기수가족운동협의회’를 만들어 남민전 관련자 석방운동과 후원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은 1985년 민가협으로 이어졌다. 그는 지금껏 민가협 공동의장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양심수가 단 1명이라도 있는 한 내가 하던 일을 멈출 수 없다”면서 “이번 촛불혁명이 발생한 원초적 문제는 바로 분단문제로 그만큼 통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80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왜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권 선생은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절친인 임헌영은 “권 선생을 결혼시키기 위해 별의별 작전을 다 짰는데 실패했다”면서 “아직도 나는 그의 거의 모든 건 알 듯한데 이 점에 관한 한 여전히 미궁이다”라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미궁을 푸는 것이 기자의 ‘심보’다. 나중에 인터뷰가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며 ‘왜 결혼을 안했나’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러자 그는 ‘별것 아닌 투로’ “어찌 하다보니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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