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형 화재

입주자들 “치명적 화재” 경고에 당국 “불나면 집에 머물라”

2017.06.14 21:48 입력 2017.06.14 23:21 수정

입주자단체, 43년 된 아파트 노후 따른 위험 꾸준히 지적

화재 대책 요구에 돌아온 건 안이한 대응법 담긴 공문뿐

정확한 화재 원인 파악과 사상자 확인에 시간 걸릴 듯

[런던 대형 화재]입주자들 “치명적 화재” 경고에 당국 “불나면 집에 머물라”

영국 수도 런던을 한밤의 불길이 덮쳤다. 14일 새벽(현지시간) 런던의 고층아파트 그렌펠타워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는 영국은 물론 세계에 충격을 줬다. 도심의 노후한 공공아파트가 통째로 불길에 휩싸인 장면은 참혹했다.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화재 대책을 요구했지만 당국이 묵살해왔다는 비난도 잇따랐다.

■ 100m 밖까지 잿더미

런던 켄싱턴 북부의 24층 아파트 그렌펠타워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소방당국에 처음 접수된 것은 이날 오전 1시쯤이었다. 불은 저층부에서 시작돼 곧 벽을 타고 올라가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소방관 250명과 소방차 40대가 출동했으나 불길이 잡히기까지 6시간이 넘게 걸렸고, 낮까지도 연기가 계속 새어나왔다. 켄싱턴첼시왕립자치구 소유인 이 아파트는 켄싱턴첼시세입자관리기구(KCTMO)가 맡아 관리하고 있으며 120가구가 입주해 있다. 화재 당시 몇 명이나 건물 안에 있었는지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연기와 유독가스로 내부가 가득 차 소방관과 구조요원들이 내부를 수색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BBC방송과 가디언 등은 “10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도 불이 난 건물에서 날아온 잿더미에 뒤덮였다”는 주민들의 말을 전했다. 몇몇 입주자들은 침대보를 늘어뜨려 탈출을 시도했고, 한 남성은 창가에서 담요를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창밖으로 내던진 엄마도 있었다. 한 이웃 주민은 PA통신에 “9층 혹은 10층에서 한 여성이 울부짖으며 아기를 창밖으로 내던졌고, 한 남성이달려나가 가까스로 아이를 받아냈다”고 말했다.

화재 규모로 볼 때 희생자 수는 수백명에 이를 수 있다. 런던소방대장 대니 코튼은 “29년 동안 소방대원을 했지만 이런 규모의 화재는 본 적이 없다”면서 “안에 수많은 사망자가 있으나 건물이 너무 크고 복잡해 숫자를 확인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피해 규모와 사망자 신원을 완전히 확인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70명 이상이 병원에서 치료 중이고, 이 중 20명은 중태로 알려졌다.

■ 주민단체 “끔찍한 재난” 경고

[런던 대형 화재]입주자들 “치명적 화재” 경고에 당국 “불나면 집에 머물라”

2009년 7월 런던 동남부 캠버웰의 아파트에 불이 나 여성과 아이 6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다쳤다. 그 뒤 노후 공공아파트들의 화재 대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조치는 미흡했다. 소방관 출신인 짐 피츠패트릭 노동당 의원은 스카이뉴스에 “2009년 화재 뒤 고층아파트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정부는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지 일간 이브닝스탠더드는 순식간에 불길이 번진 낡은 아파트를 ‘죽음의 덫’이라 표현했다. 1974년 지어진 그렌펠타워는 시설이 낡고 안전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다. 그렌펠타워와 인근 지역 주민들이 2010년 결성한 ‘그렌펠액션그룹’은 2012년 초부터 수차례 “치명적인 화재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단체는 2013년 5월 전기설비 화재가 걱정된다며 당국에 조사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관리기구가 보낸 공문을 공개하면서 “실내에 불길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냥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공지만 했다고 밝혔다. 당시 관리기구는 “그렌펠타워는 엄격한 안전기준에 따라 설계됐고 새로 설치된 현관문은 30분간 화재를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일단 그대로 있으라’는 1950년대 이후 영국의 화재 안전 기본지침이다. 2009년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렌펠타워 관리기구는 지난해 5월 아파트 외벽을 알루미늄 합성피복으로 보강했다. 그러나 이번 화재는 외벽을 타고 순식간에 번졌다. 한 주민은 “벽면이 성냥에 불이 붙듯 타올랐다”고 했다. 보수당의 소방관 출신 의원 마이크 페닝은 “외장재 위로 불길이 번진 까닭이 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캠버웰 화재 이후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의 하나”라면서 “또 다른 질문은 불이 번진 속도”라고 말했다. 당국은 그렌펠타워와 비슷한 공공아파트 외벽 보강재들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 불안감 속 연대 나선 시민들

칸 시장은 이날 ‘중대 사고’를 발령했다. 이는 응급기관 1곳 이상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 내려지는 경보 단계다.

유명 방송인인 피어스 모건은 트위터에 “이번 화재는 추악한 수치다. 현대 영국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적었다. 석 달 새 3차례 테러에 화재까지 겹치면서 시민들의 불안과 혼란은 커지고 있다. 테러와 관련돼 있다는 정황은 없음에도, 혹여 반이슬람 정서와 연결될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수지 설리번이라는 여성은 트위터에 “(이번 화재는) 테러와 아무 연관도 없다. 집과 목숨을 잃은 무슬림들을 기억하자”고 적었다. 피해자 상당수가 아프리카계 무슬림 주민들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간신히 불길을 피해 대피한 거주자들은 갑자기 이재민이 됐다. 온라인 모금과 옷, 음식, 담요 같은 물품 지원 등 위로의 손길이 이어졌다. 트위터에는 런던의 교회, 모스크, 시크교 사원 등에서 음식과 담요, 옷 등 일용품을 모아서 피해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공지가 계속 올라왔다. 온라인 모금 사이트들도 잇달아 생겼다. 유명 셰프 제이미 올리버는 피해자들에게 먹을거리를 내주겠다고 했다. 아파트 주변 랭커스터 커뮤니티센터는 이날 정오 “장소가 모자라 더 이상 기부품을 받을 수 없다”는 표지판까지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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