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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기획-미디어]‘가르치려 드는' 언론이 싫다는 사람들

2017.10.06 10:20 입력 2017.11.10 16:17 수정

권호욱 선임기자

권호욱 선임기자

NGO 활동가 오성근씨(36)는 2004년부터 줄곧 진보정당을 지지했다. 2004년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여파 속에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진보진영 위상이 매우 높아진 시기다. 오씨는 이후 진보신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현재는 녹색당원이다. 총선 정당투표에서 항상 진보정당을 찍었다.

오씨는 지금 스스로를 ‘문빠’라 부른다. 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인 그는 문 대통령 ‘친구’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했던 자신을 “진보 워너비(wanna be)였다”고 회상한다. 그 시절 즐겨본 ‘한·경·오’(한겨레·경향신문·오마이뉴스) 같은 진보성향 매체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오씨는 “한·경·오는 1980년대 운동권 화석(化石)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한·경·오를 즐겨봤고 심지어 추종했죠. 동의가 안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평소 훌륭한 얘기를 하는 분들이니까’하면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진보 운운하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에게 척을 지는 행동을 하죠.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음의 소리’가 결정적으로 사람을 좌우하는데 말이죠. 한·경·오 역시 마찬가지예요.”

[창간 기획-미디어]‘가르치려 드는' 언론이 싫다는 사람들

오씨처럼 진보주의를 지향하던 사람들이 노무현·문재인 전·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리버럴’로 분화한 건 최소 10년 이상 시간을 두고 일어난 변화였다. 이들이 진보진영에 보이는 비우호적 반응도 새롭지는 않다. 진보성향 언론 불신을 넘어 사실상 혐오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 일로 보인다. 왜일까. 문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한·경·오 혹은 경향신문을 왜 싫어하는가.

■검색창에 ‘한·경·오’를 넣어봤더니…

요즘 MLB파크, 클리앙, 오늘의유머, 뽐뿌, 루리웹 같은 게시판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커뮤니티엔 ‘한·경·오’를 비판하는 글이 하루가 멀다하고 올라온다. 이 커뮤니티들은 대체로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는 곳이다. ‘한·경·오’란 말 역시 이 커뮤니티에서 만들고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선 ‘한·경·오’를 다소 경멸적인 뉘앙스를 담아 사용한다. 주로 ‘정의당’ ‘386’ ‘운동권’ ‘민노총’(민주노총) 같은 단어들과 엮어 소위 ‘낡은 진보진영’의 대명사처럼 다룬다. 정확히는 자신들은 ‘신좌파’, 앞에 나온 그룹들은 ‘구좌파’로 구분짓는다.

이들이 진보진영과 정체성을 달리한 역사는 짧지 않다. 한·경·오란 말로 진보성향 언론을 싸잡아 비판하기 시작한 건 2016~2017년부터로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이전에도 한·경·오란 말을 사용하긴 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흔적은 2009~2010년부터 발견된다. 문 대통령 지지자 다수가 한·경·오의 ‘원죄’로 언급하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수가 사용했고, 대체로 보수성향 언론을 일컫는 ‘조·중·동’의 대항마란 색채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커뮤니티 MLB파크 BULLPEN(불펜) 화면 갈무리

인터넷 커뮤니티 MLB파크 BULLPEN(불펜) 화면 갈무리

하지만 지금은 ‘돈 없는 조·중·동’이라고 부르며 일종의 기득권 집단으로 취급하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이 현상은 대선이란 ‘정치의 계절’을 맞은 올해 초부터 더욱 극심해졌다. “조·중·동보다 한·경·오가 더 싫다”는 글도 심심찮게 보인다. 경향신문이 만난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대체로 반드시 특정 인물이나 정치 지향에 대한 호오(好惡) 때문만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나를 따르라’는 계몽주의적 태도

“가르치려 든다.” 한·경·오 혹은 경향신문이 왜 싫으냐는 물음에 이 같은 인상비평이 다수 나왔다. “진보는 싸가지가 없다더니 한·경·오가 딱 그렇다”(건설노동자 임세현씨) “먹물 같은 느낌, 룸펜 같은 느낌”(오성근씨) “펜대를 잡고 권력을 쥐었다고 느끼는 것 같다”(회사원 이모씨) 같은 말들엔 경향신문이 권위주의적 태도를 지녔다는 주장이 담겼다.

이는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 일부 남성들이 경향신문을 비판하듯 가치·지향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체나 화법 문제(“어려운 말로 비웃듯이 말한다” “수능 논술처럼 재미가 없다” “생각이 다르면 못 배웠거나 잘못했다고 하는 것 같다” 등), 독자와의 소통(“‘난 기사를 썼으니 넌 그냥 받아들여라’는 식의 태도” “틀렸으면 틀렸다고 인정할 수 있었으면” “오보를 정정하면서 설명하는 걸 본 적 없다” 등) 문제가 반영됐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 팟캐스트 등 대안매체가 여럿 생겨 비교대상이 늘었다. 또 SNS를 통한 라이브 방송 활성화 등은 대중이 기사의 원천자료에 보다 쉽게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미디어 리터러시’(미디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혹은 그렇다고 믿는 대중이 많아진 것이다.

팟빵(http://www.podbbang.com/) 화면 갈무리

팟빵(http://www.podbbang.com/) 화면 갈무리

“팟캐스트가 네티즌을 포함한 독자 목소리를 반영하는 데 좀 더 적극적이라는 인상이 들어요. 직설적이고 솔직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피드백도 빠르죠. 비판에 수긍을 하든, 해명을 하든 소통 노력도 보이고요.”(의료인 한모씨) “예전엔 언론사가 제시한 프레임 안에서 볼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온갖 매체가 많잖아요. 페이스북을 통한 라이브 방송도 활성화돼 있고. 이제 사람들이 기사 바탕이 되는 ‘원소스’를 알 수 있고 나름의 판단을 하게 된 거죠.”(변호사 진재용씨) “이제는 언론이 가공한 프레임 자체를 안 받아들이는 거예요. 자기 스스로 판단을 하는 거죠. 기자회견, 국정감사, 청문회 모두 다 생방송으로 찾아서 봐요.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발표하면 그 전문도 다 찾아서 읽고요.”(회사원 이모씨)

■뉴스피드에서 어쩌다 마주친 한·경·오

경향신문이 만난 한·경·오를 비판하는 시민들 중 어느 누구도 종이신문을 구독하거나, 홈페이지를 방문해 뉴스를 보는 경우는 없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에 다른 사람이 공유한 뉴스를 보는 등 대체로 달라진 뉴스 소비 패턴을 따랐다. 경향신문 역시 뉴스피드나 게시판에 걸린 기사들 중 하나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선별해 공유한 단 몇개 뉴스를 통해 경향신문의 이미지를 형성하거나 강화한다는 점이다. 누군가 특정한 의도를 갖고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를 차치하고라도, 하루 수백개 기사를 생산하는 언론사가 이제 단 한두개의 기사로 평가받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편집자들이 생각하는 오늘의 중요한 이야기와 밖에서 떠돌아다니면서 칭찬받거나 욕먹는 기사가 현실에선 아예 다르다”(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지적이 나온다.

정지윤 기자

정지윤 기자

정치인의 발언을 갖고 쓰는 소위 ‘워딩 기사’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언론에서 속보성으로 쓰는 이런 류의 기사들이 MLB파크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곧잘 공유되는데,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랐다. 언론 입장에선 따옴표(“”)로 인용보도를 했을 뿐이지만, 커뮤니티에선 ‘일방적 주장의 전달’로 인식하는 것이다.

특히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 담긴 발언을 여과없이 썼을 경우엔 언론이 그 정치인의 ‘편을 들었다’는 해석까지 낳는다. 지난 대선에서 대부분 언론이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후보에 특히 호의적이었다는 일부 문 대통령 지지자들의 인식은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적절한 논평이 좀 필요하다. 언론이 최소한 맞다, 틀리다 정도는 가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진재용씨) 같은 문제의식이 나온다.

또 “비판 뿐만 아니라 설득력 있는 대안들을 치열하게 논의하는 장을 여는 역할까지 해야하지 않나”(한모씨) “의혹이나 비판을 제기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지만, 더 큰 정치적·사회적 맥락 역시 다뤄줬으면 좋겠다”(회사원 이정호씨) 등 말들은 심층 취재·분석 기사에 대한 바람으로 풀이된다.

[창간 기획-미디어]‘가르치려 드는' 언론이 싫다는 사람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뤄지는 ‘팩트체킹’ 작업에 높은 신뢰를 보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여러 사람이 여러 기사를 모아놓고 비교해 ‘팩트’만을 뽑아내거나 오보나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 지지에 여초 성향의 비공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이모씨(31)는 “사람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됐다. 어느 하나만 믿고 매몰되면 안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를 견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어느 언론도 100% 신뢰는 받지 못하는 현실과 보다 깊이 있는 기사에 대한 갈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불가피한 반지성주의 경향…다른 접근법 모색해야

전문가들은 ‘한·경·오 현상’을 어떻게 볼까.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부실한 엘리트주의’가 횡행한 가운데 ‘반지성주의’가 힘을 얻어온 흐름 속에서 파악했다. 윤 교수는 이 반지성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불가피한 변화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제는 언론이나 교육을 통하지 않아도 누구나 조금만 신경을 쓰면 정보를 직접 많이 얻을 수 있고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이때의 정보 역시 어느 전문가가 만든 것일 가능성이 큰데, 그럼 결국 정보를 선택하는 기준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정서로 세우게 된다. 이것이 반지성주의의 핵심이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정서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사람들이 훨씬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거시적인 맥락에서 봐야하는 것 같다.”

▶관련기사: [정동칼럼]부실한 엘리트주의와 무모한 반지성주의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언론의 변화를 강조하는 편이다. 이 교수는 한·경·오 현상을 두고 기존 엘리트·전문가 담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대변자를 찾아나서는 ‘비판적 담론 공중’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교수는 “경향신문이 문 대통령 지지자들과 같은 진보적 가치를 지녔는데도 외면받으면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게 과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가르치려 든다’는 인식은 다른 곳에서 접하는 정치적 담론의 수준보다 경향신문의 품질이 높으냐, 뉴스 수용자도 충분히 생각해봤고 자신의 의견이 있는데 언론이 왜 가르치려고 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언론의 글쓰기 방식도 더 재밌고 친근하게 바뀔 필요가 있다. 문체도 문체이지만, 시민들을 ‘동료’로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있다. 오디언스 인게이지먼트(audience engagement·독자 참여), 즉 이용자에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건 이제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어떤 것이 이른바 ‘먹히는’ 기사인지 재빨리 판단해서 SNS 등에서 이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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