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북핵부터 해결하라는 건 천지 분간 못하는 소리”

2018.01.13 16:07 입력 2018.01.14 09:38 수정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1월 10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1월 10일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1월 9일, 2년 만에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까지 언급했다. 문 대통령의 통일정책을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문 대통령 신년사를 두고 “민주정부 3기라는 게 입증됐다”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임기 반환점 이전에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의 10·4선언은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시행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 전 장관은 인터뷰 내내 북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과 북한의 수교’와 ‘평화체제 구축’ 외에는 답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 전 장관은 ‘다리를 놓는 역할’을 강조했다. 당사자들만 두면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사무실에서 정 전 장관을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북핵과 남북대화를 언급했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해결돼야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고 남북관계가 개선돼야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분은 북핵이 해결되지 않는 한 관계개선이 어렵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국민들 중에는 통일까지 가는 것에 대해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분단상황으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이들은 북핵이 해결돼서 통일로 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 문 대통령 발언의 앞부분은 그런 사람들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포인트는 ‘관계가 개선돼야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후반부에 있다. 관계를 개선해나가면서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 같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핵문제 해결 병행’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민주정부 3기라는 게 입증되는 대목이다.”

-북한은 그동안 ‘북핵은 북핵이고 대화는 대화’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북핵은 미국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북한이 25년 전부터 요구했던 것은 두 가지다. 미·북수교와 평화체제다. 미·북수교와 평화체제는 사실상 동의어인데 이건 미국이 결정하지, 대한민국 대통령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꾸 우리 정부더러 북핵부터 해결하라고 하는데 이런 맥락을 보면 그건 천지 분간 못하는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이런 면에서 북한이 북핵은 미국과 해결한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정부는 이 가운데서 무엇을 할 수 있나.

“말했듯이 문제의 근원은 미·북 적대관계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우리가 나서서 미국과 북한에 ‘수교문제를 해결하든지 해서 우리 좀 편하게 살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남북관계가 개선돼야 한다. 우리가 남북대화를 하는 이유는 남북대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북핵이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불가피하다.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남북대화를 먼저 시작한다는 거다.”

-북한이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경제협력’일텐데 문 대통령이 이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대북제재를 완화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대규모로 경제협력을 못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지금 당장 대규모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보면 인도적 지원까지 막고 있는 건 아니다. 인도적 지원부터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인도적 지원의 구체적인 내용이 안보리 결의안에 저촉되느냐 아니냐는 해석은 유엔 사무국에 있지 않다. 미국 재무부에 있다. 그게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미국 재무부 해석의 문제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

“박근혜 정부 홍용표 통일부 장관 시절 일이다. 당시 박 정부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두고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위반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미국 재무부 고위당국자는 ‘금강산 관광이 유엔 결의안에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끌고 가려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게 실체적 진실이다. 지금 상황에서 뭐는 되고 뭐가 안 된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한·미 간에 소통을 잘하고 외교부가 간절히 원하면, 간절히 부탁을 하면 미국 재무부가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해줄 것이다.”

-경제협력 외에 북한이 원하는 건 무엇이라고 보나. 동계올림픽 기간에 예정됐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연기됐다.

“안 때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조금 있다가 때릴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군사훈련 연기도 마찬가지다. 북한 입장에서 연기는 메리트가 없고 중단하는 게 제일 좋다. 북에 군사훈련은 굉장히 큰 부담이다. 없는 살림에 탱크 움직이고 군함도 띄워야 하고 대포도 이동해야 한다. 경제적 손실이 엄청나다. 그래서 해마다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거다. 그게 안 되면 축소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느냐다.”

-지금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문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정상회담을 비롯한 어떠한 만남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은 당연한 이야기다. ‘필요하다면’이라는 발언은 남북대화가 속도를 못내고 있을 때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라거나, 일이 잘 되어서 남북관계를 평화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로 읽힌다. 1월 9일 합의된 내용을 보면 올림픽 선수단과 대표단 참가하는 문제는 실무회담을 하기로 했고, 그 다음에 군사회담을 하기로 했다. 또 앞으로도 필요하면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했다. 군사회담이나 고위급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꽉 막혔을 때 돌파구로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화룡점정’ 식으로 정상회담으로 마무리를 할 수도 있다.”

-이번에 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온 것은 참여정부에서 얻은 교훈이 아닐까.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4일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동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지금이 문재인 정부 2년차다. 내년이 되면 3년차로 들어간다. 정상회담을 하려면 임기 반환점 전에 하는 게 좋다. 그래야 정상회담 결과를 남은 2~3년 동안 제도화할 수 있다. 이렇게 설정을 해놓으면 남북대화에 적대적인 정권으로 교체가 되더라도 뒤집기가 쉽지 않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휴게소에 들러서 운전사를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시동도 걸기 전에 운전사가 바뀌면 고속도로에 들어가지도 못할 수 있다. 2007년 10월 4일 합의는 시작도 못하고 정권이 교체돼 버렸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는 대화와 제재를 병행하겠다고 했다가 집권 초에는 제재와 압박 기조로 돌아섰다. 이런 혼선은 왜 발생했다고 보나.

“혼선이 아니다. 한·미 공조의 기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다. 당시 미국 트럼프 대통령 기조가 ‘압박’이었다. 일탈하지 말라면서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 정부가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할 거야’라고 해버리면 미국이 꺼려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아예 남북대화를 할 수가 없다. 미국에 의심을 받지 말아야 한다. 정부 출범 초반에 미국이 노무현 전 대통령 못지않게 문 대통령을 의심한 것 같다. 대화를 풀어가려면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 문 정부는 남북문제와 관련해 미국과의 관계를 잘 설정하고 있다고 평가하나.

“트럼프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환영한다고 하고 대화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알려달라는 말까지 했다. 문재인 정부가 초기에 트럼프 정부와 보조를 맞춘 덕이다. 이런 면에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치켜세워주는 것은 잘하고 있다. 신년사에서도 ‘남북대화 성사에 트럼프 대통령의 공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그렇게 해줘야 움직이는 타입인 것 같다. 미국이 힘을 보탠다고 하면 그 정도 립서비스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단계를 밟으면 ‘9·19 공동성명’ 단계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9·19 공동성명은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 당사국이 채택한 것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에너지를 지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9·19 공동성명을 보면 결국 미·북수교다. 9·19 체제로는 안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것이니 쓰지 말자는 건데 이런 논리를 펴는 사람들 중 일부는 분단상황에서 이득을 보는 기득권이다. 9·19 공동성명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거다. 그렇게 되면 한·미 연합훈련을 못한다. 무기시장도 줄어든다. 지금 무기시장에서 편하게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거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는 미·북수교와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 수교도 못하면서 비핵화를 요구하면 말이 안 된다.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협상을 하든지간에 미·북수교와 비핵화를 맞바꾸는 것 이외의 해결방법은 없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과 북한 간에 해결해야 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6자회담이 여전히 유효한 틀이라고 볼 수 있나.

“실질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문제를 미국과 북한에만 맡겨놓으면 진전이 안 된다. 양자는 제로섬 게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윈·윈’으로 만들려면 중간자가 있어야 한다. 그게 한국과 중국, 러시아다. 그동안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중국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외주’를 줬다. 또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를 통과시키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의 협조를 받았다. 북핵과 중·러를 연결시킨 게 미국이다. 따라서 원리적으로 볼 때 앞으로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한국은 최대 피해자이기 때문에 회담에 가야 한다. 일본은 이 문제가 해결되길 내심 바라지 않지만 미·일동맹이나 한반도 상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가려고 할 것이다.”

-이번 남북대화 국면에서 우리 정부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할까 그런 것은 뭐라고 보나.

“북핵은 24~25년 된 문제다. 그 기원 자체가 미·북수교와 평화협정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남북 정상회담을 하더라도 미·북 양국 간의 대화로 이어질 수 있는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미국에서 도와준다. 북한 입장에서도 그런 정도의 매력이 있어야 나온다. 2000년 정상회담 당시 미·북관계 개선을 위해서 김대중 정부가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 결과 심지어 클린턴이 북한에 가려고도 했다. 그때의 성공 사례가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한다면 일찍 해서 미·북관계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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