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2018.03.09 17:02 입력 2018.03.13 14:32 수정
이영경 기자

‘월급쟁이 퀴어 모임’ 아시나요

직장에서 못하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모임 ‘월퀴모(월급쟁이 퀴어 모임)’의 운영진 긍정, 왕페이, 유동이, 민이 지난 1일 경향신문사에서 직접 쓴 손글씨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정지윤기자

직장에서 못하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모임 ‘월퀴모(월급쟁이 퀴어 모임)’의 운영진 긍정, 왕페이, 유동이, 민이 지난 1일 경향신문사에서 직접 쓴 손글씨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정지윤기자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해외 연구들을 참고하면 인구의 3~7%는 성소수자로 파악된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직장 동료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국가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10명 가운데 7~8명이 직장에서 단 한 명의 동료에게도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성소수자임을 밝히는 순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드러낼 수 없는 존재, 한국의 성소수자는 분명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우리도 함께 일하고 있다”고 목소리 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월급쟁이 퀴어 모임(월퀴모)’은 직장인 성소수자들이 숨통을 트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지난해 4월 처음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고, 현재 팔로워가 1174명으로 늘었다. 월퀴모 운영진 긍정, 왕페이, 유동이, 민(닉네임)을 지난 1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긍정은 기획자로 일하는 레즈비언, 왕페이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레즈비언이다. 유동이는 홍보일을 하는 레즈비언, 민은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으며 정체성은 ‘퀘스처너리(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탐색 중인 상태)’로 자신을 소개했다. 20~40대 ‘월급쟁이 퀴어’들에게 월급쟁이와 퀴어로서의 삶의 애환을 들었다.

-‘월퀴모’는 어떤 곳인가요.

긍정=SOGI(성적지향·성별정체성) 법정책연구회 인권아카데미에서 서로 알게 됐다. 네 명이 함께 브런치를 먹다가 ‘직장 내 퀴어가 우리만 있는 건 아닐 거야’라는 생각에 격식 없는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민=트위터에 ‘월퀴모’를 만들겠다고 올렸더니 리트윗이 많이 되고 반응이 좋았다. 이런 모임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았던 거다. 지난해 4월 첫 모임을 가진 이후 매달 한 번씩 모이고 있다. 성소수자로 겪는 차별부터 상사 욕까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오간다.

유동이=20~30대 직장인들이 많이 온다. 지난 2월에는 ‘연말정산 치맥파티’를 열고 치맥을 먹으면서 컬링을 봤다. 개발자, 웹디자이너, 마케터, 문화예술계·의료계 종사자, 프리랜서,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왕페이=참석자 한 분이 “나를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굉장히 오랜만인 느낌”이라고 말했다. 성소수자들은 편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데가 없는데 필터링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피로감이 줄어드는 것 같다.

민=모임의 가이드라인이 있다. ‘외모로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판단하거나 소수자 내에서 소수자를 차별하는 발언하지 않기’ ‘서로 존대하기’다. 이런 사항들은 모임 내에서 꼭 지켜야 할 약속이다.

■ 팀 쿡 같은 커밍아웃은 너무나 먼 얘기

-채용이나 일에서 겪은 차별은 없나요.

긍정=짧은 머리 때문에 이력서를 낼 때부터 위축된다. 면접에 가면 “남자인 줄 알았다.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나서야 여자인 줄 알았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나는 뽑혀야 하는 을이니까 항의할 수가 없다. 입사 후에도 “남자래, 여자래”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회식 자리에서 “긍정이가 무슨 여자야, 아니지~” 같은 말을 하는데 혹시 ‘떠보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늘 덜컹덜컹한다. 이전 회사에서 ‘머리를 길러라, 언제까지 학생처럼 하고 다닐 거냐’라고 외모에 대한 참견이 심해서 일을 그만 둔 적도 있다.

왕페이=이직하면서 처음엔 커밍아웃을 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포기했다. 지난해 대선 토론회에서 ‘동성애 반대’ 발언이 나온 다음날 동료에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일 이야기만 나누고 개인적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됐다. 결혼하는 동료 소식도 뒤늦게 알게 되기도 한다. 동료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지 않는 건 외로울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 말할 게 아니면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낫다.

유동이= “남자들이 안 좋아하게 생겼다. 머리도 기르고 여성스럽게 꾸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불쾌하다. 직장에서 팀 쿡(애플 최고경영자)처럼 커밍아웃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고 그럴 기회도 없다. 한 번은 부장이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너는 왜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아?”라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다’는 식의 말투였는데 아우팅을 하거나 괴롭히려고 한 말 같았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성소수자 관련 주요 용어

ㅣ성적지향 : 성적 또는 정서적으로 어떠한 성별의 상대방에게 끌리는지를 나타내는 용어. 크게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동성·이성에게 모두 끌림)로 나눌 수 있다.

ㅣ성별정체성 : 자신을 여성, 남성, 그 밖의 성별 등 어떠한 성별로 느끼고 살아가는지를 가리키는 용어. 생물학적 성별과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치하지 않을 경우 트랜스젠더라고 한다.


민=상사들이 “결혼 안 하냐”고 물으면 비혼주의자나 무성애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실제 무성애자일지도 모른다고 고민해왔으며, 성적지향을 탐색 중이다. 비혼이다 보니 기혼 남성에게 승진에서 밀리기도 한다. 여성혐오와 성소수자혐오가 섞인 것이다.

-직장 동료 중에 커밍아웃한 상대가 있나요.

유동이=내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는 동료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커밍아웃 하고 있다. 핸드폰에 무지개 스티커를 붙이고, 퀴어문화축제에 다녀왔다고 얘기하며 ‘나만의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한 번은 직장 동료가 둘이 밥 먹자고 했다. “나도 사실 레즈비언이다. 처음 털어놓는다. 유동이씨한테는 얘기해도 안전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긍정=친한 동료 2명이 알고 있다. 내가 퀴어인 걸 아는 동료가 “쟤들은 너에 대해 다 알 거야. 그런데 니가 말하지 않으니까 모른 척하는 거라 생각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묻지도 않고 아는 척하지도 않는 게 더 편하다. 아는 척을 하면 가슴이 덜컹 한다.

-사회적으로 동성애 혐오가 심각합니다. 실제 경험한 적이 있나요.

긍정=2014년 신촌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 처음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울면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 회개시키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란 생각을 하다가 충격으로 체하고 열이 나서 집으로 갔다. 내가 피해를 주거나 잘못한 게 없는데, 서로 다른 사람이고 다른 형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 되는데…. 그 장면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왕페이=지난해 대선 때 충격을 받았다. TV 토론에서 공개적으로 혐오 발언이 나온 것이다. 보수세력이 성소수자 인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진보세력이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엄마와 통화하면서 투표할 때 성소수자 인권을 고려해달란 이야기를 하다 계획하지 않은 커밍아웃을 했다. 엄마는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인데, 자기가 혐오하는 대상이 딸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너는 엄마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냐’고 거꾸로 된 질문을 던졌다.

유동이=초등학교 시절 TV에서 레즈비언을 다루면서 ‘더럽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그때 레즈비언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고, 동시에 숨겨야 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됐다. 내 이름을 찾은 동시에 혐오를 알게 된 것이다.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하다.

■ “밝혀진다고 갑자기 일을 못하게 되진 않잖아요”

-회사에서 원하는 제도나 지원이 있나요.

긍정=사규에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명시했으면 좋겠다. 차별받았을 때 문제제기할 창구가 있으면 좋겠다. 회사에 그런 조항이 있으면 더 애사심이 생기고 더 열심히 일할 것 같다. 몇몇 사람은 혐오할 수 있지만 든든할 것 같다. 회사로서도 훌륭한 인력을 버리지 않으려면 이런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퀴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서 잘하던 일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왕페이=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밝힌 곳에선 직원들도 혐오를 드러내놓고 할 수 없다. 일하는 곳이 나에게 안전하다는 메시지만 던져도 좋은 것이다. 비혼 직원에 대한 복지혜택 차별이 없으면 좋겠다. 모든 복지가 기혼 직원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동료들에게 바라는 건 내 동료가 퀴어일 수 있고, 작은 말에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좋겠다. “너 맞지?”라고 쉽게 물으며 아우팅을 하는 것도 문제다. 상대방이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하지 않고 조심하는 게 좋다. ‘혐오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월퀴모 계획은.

긍정=퀴어 퍼레이드에 월퀴모 부스를 열고 참여하고 싶다. 사장님들이 직원 중에도 퀴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

유동이=마음속 이야기를 할 데가 없는 퀴어 직장인들에게 편안한 소통 창구가 되면 좋겠다. 성소수자들에겐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호모포비아(성소수자혐오)일 것이라는 공포가 있다. 월퀴모 같은 안전한 공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좋겠다.

성소수자 중의 약자 ‘트랜스젠더’
기업 면접 때 “궁금하니 와보라” 막말도



“쓰레기 같은 존재죠. 아주 없애버리고 싶은데. 내가 이 숫자 하나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고, 이런 시선을 받고 살아야 하나.”

경기도 안산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MTF) 초희씨가 말했다. ‘쓰레기’ 같은 존재는 바로 주민등록번호다. ‘1’로 시작하는 번호 때문에 그는 번번이 채용과정에서 미끄러진다. 결국 그를 받아준 곳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안산공단이었다. 인종이나 성별보다는 ‘일을 할 수 있느냐’를 더 보는 곳이다. 트랜스젠더를 받아주는 직장은 많지 않다. 초희씨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지난해 펴낸 <나, 성소수자 노동자>에 소개됐다. 인권연대는 “이력서에 찍힌 주민등록번호와 외적인 성별의 차이는 그 자체로 아우팅”이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가운데서도 노동시장에서 가장 차별받는 존재는 트랜스젠더다. 법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다르다 보니 채용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 트랜스젠더인 박한희 변호사는 “트랜스젠더 대부분이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는 직장을 찾게 되고, 그런 직장들은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다”며 “성별정정을 위한 수술을 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불안정하고 보수가 적은 일을 하다 보니 성별정정을 못 하는 악순환에 처한다”고 말했다.

2014년 국가인권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트랜스젠더 가운데 구직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은 85.9%에 달했다. 구직의 첫 단계인 지원서 제출에도 절반에 가까운 트랜스젠더가 어려움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응답자들은 “면접 때 대놓고 성기가 어떤 게 달렸냐는 질문을 받았다” “트랜스젠더라 궁금해서 면접 와보라 한 것이라는 막말도 들었다”고 답했다.

외국 기업에서는 성별중립 화장실을 마련하고, 트랜스젠더 직원들의 트랜지션(성별정정) 수술을 지원하는 기업도 있다. 일본 기린홀딩스는 트랜스젠더 직원이 성별정정 수술을 받는 경우 최대 60일의 유급휴가를 지원해준다. 불임치료 수술을 받는 경우 지원하던 유급휴가를 트랜스젠더 직원에게도 확대 적용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트랜스젠더 존재 자체가 터부시된다. 2015년 말 삼성SDS에서 트랜스젠더 직원이 성별정정 수술을 위해 병가를 신청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퇴사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박한희 변호사는 “입사지원서부터 성별을 표기하지 않고 주민등록번호를 안 적는 식의 블라인드 채용이 필요하다”며 “회사에서 일하면서 트랜지션을 하는 경우 병가 등 최소한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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