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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과 ‘여성 기본소득’

2018.09.21 19:20 입력 2018.09.21 19:32 수정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염려는 해묵은 이야기이며, 이것이 극복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 또한 보수와 진보가 한목소리를 내어온 문제이다. 이러다 ‘배달민족’이 소멸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초월적·거시적 관점도 있으며, 경제활동 인구의 감소로 인한 잠재 성장률 하락을 걱정하는 실용적 관점도 있지만 결론은 항상 무조건 출산율 제고의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여기에 예산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듯 보인다.

[세상읽기]출산율과 ‘여성 기본소득’

하지만 나는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러한 사회공학을 통하여 출산율을 올리는 일이 실질적으로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둘째, 그 가능성 여부와 별개로, 이것이 과연 ‘여성의 자유’라는 점에서 용납될 수 있는 일인가?

출산율은 기복이 심하고 그 변동 폭도 큰 지표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여러 자연적·사회적 환경 요소들 - 기근, 질병, 기후 변화, 전쟁, 혁명 등 - 이 나타날 때마다 인간사회는 그러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출산율의 변화를 겪게 된다. 20세기에 있었던 2차 산업혁명과 고전적인 산업사회 또한 출산율의 큰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다.

지난 7월27일자 ‘이코노미스트’지에 게재된 글 “아이 없는 세상의 발흥(The Rise of Childlessness)”은 흥미로운 차트를 보여주고 있다. 통계자료를 구할 수 있는 주요 5대 산업국의 경험을 보니, 아이가 없는 여성들의 비율이 20세기 초에는 20%를 훌쩍 넘고 있었다. 그러다가 50년대와 60년대가 되면 그 숫자가 5% 정도로 뚝 떨어졌다가 최근 들어 다시 20%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출산은 특히 하층 계급의 여성에게는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었다고 한다. 청소년 시절부터 하녀생활과 견습공 등 오랜 기간 힘을 쏟아 일정한 삶의 터전을 마련한 뒤에야 꿈꾸고 계획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후 2차 대전이 끝나고 이른바 ‘풍요한 사회’가 오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개선되고 핵가족제도가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것이 출산율 제고, 인구 증가, 시장 및 고용 확대와 경제 성장 등의 순환 고리를 낳는 하나의 원천으로 간주되면서 이 순환 고리 전체가 하나의 ‘규범’처럼 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21세기의 산업사회는 그러한 ‘규범’에서 일탈한 지 오래이다. 혼자 일해서 가족 전체를 부양할 수 있는 소득을 얻는 이들은 결코 다수가 아니며, 오히려 ‘맞벌이’가 규범이 되었고, 출산과 육아와 교육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담이 되어 버렸고, 설령 청년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 지금의 노동시장은 만족스럽게 그 일자리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상태이다.

이렇게 20세기형 산업사회가 종말을 고함에 따라 여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조직하는 계획과 전략도 20세기 초 이전에 일반적이었던 양태를 다시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출산율 감소라는 것도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출산율 감소라는 것은 산업사회의 변모와 진화에 따른 대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정책과 제도로 ‘교정’하고 ‘대처’해야 할 ‘병리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우선 과연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그 실제적 효과도 심히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변화하는 세상에서 능동적으로 삶의 패턴과 계획을 바꾸어 나가는 여성들 스스로의 자유와 자결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무조건적인 출산율 증가를 외치기 전에 도덕적·철학적으로 또 현실적·과학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질문들이 무수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출산율 정책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인간세상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자유’라는 원리와 모순되지 않으면서 정말로 출산율을 끌어올리고자 한다면 ‘여성 기본소득’이라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효과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 밑 빠진 독처럼 지출되는 거액의 각종 출산율 정책 예산을 차라리 모든 성인 여성들에게 직접 현금으로 나누어 주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든 여성들이 삶에서 취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선택의 자유가 확장된다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출산율 감소 추세가 역전될 수도 있을 터이니까. 최소한 여성들을 ‘씨암소’로 보는 무지막지한 출산율 정책보다는 이쪽이 훨씬 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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