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패전국 여성의 몸은 전리품인가

2018.11.16 20:56 입력 2018.11.16 20:58 수정

함락된 도시의 여자

익명의 여성 지음·염정용 옮김

마티 | 344쪽 | 1만8000원

[책과 삶]패전국 여성의 몸은 전리품인가

이 책은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20세기 최악의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전범국 독일 국민이 쓴 전쟁 수기다. 1945년 4월, 러시아군은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2차 세계대전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베를린에서 시민들은 통신과 전기, 수도가 끊긴 상태로 고립됐다. 그 속에는 나치당원, 여전히 히틀러의 승리를 믿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전쟁 발발 후 6년, 1945년 베를린은 인구 270만명 중 200만명이 여성인 ‘여자만 남은 도시’가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격의 공포 속에 익명의 여성은 쉼없이 글을 쓴다.

이 책은 또한 모든 여성이 전쟁 상황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었거나, 오늘날도 겪고 있는 이야기다. 1945년 4월27일, 러시아군은 익명의 여성이 머물고 있는 지하 방공호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8주간 이어진 저자의 기록에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일’이 언급된다. ‘그 일’은 러시아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강간을 말한다. 베를린에서만 11만명, 독일 전역에서는 최대 100만명의 여성들이 피해를 당했다.

전시 성폭력 문제는 국제전, 국지전, 내전, 무력분쟁 등 전쟁의 수준을 막론하고 세계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다. 최근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이 있었다는 정부의 공식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가가 국민을 ‘적’으로 보고 공권력을 행사할 경우, 전쟁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전시 강간은 “군사적 응징 내지 보복의 수단”(수전 브라운밀러)으로 손쉽게 자행된다. 책에서 독일 여성을 강간하려다 장교에게 제지당한 어느 병사는 “독일 놈들이 우리 여자들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되받는다. 전시 강간의 뿌리에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있다. 브라운밀러는 1975년작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에서 “전쟁은 평시에도 남성이 가지고 있던 여성에 대한 멸시를 극대화해 폭발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심리적 배경을 제공한다”고 말한 바 있다.

2차 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함락된 베를린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2008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막스 파르베르복 감독의 〈베를린의 여인〉의 한 장면.

2차 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함락된 베를린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2008년 영화로 만들어졌다. 막스 파르베르복 감독의 〈베를린의 여인〉의 한 장면.

“창백한 금발의 여자”이자 “출판사 직원”이었던 저자는 공책 두 권과 메모지, 리넨 천을 씌운 장부 한 권에 자신의 일상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러시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던 저자는 러시아 군인들의 말을 주민들에게 옮겨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병사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 주민들은 철저히 외면한다. 저자는 결심한다.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마리 늑대를 불러들여야”겠다고. 러시아 장교와 관계를 맺으면 적어도 밤마다 반복되는 강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전쟁통에 ‘생존 공동체’로 묶여버린 미망인과 파울리씨와 함께 나눠 먹을 빵과 감자, 고기도 얻을 수 있다.

그의 행동은 낡은 ‘피해자성’의 틀로 보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극한에 내몰린 이에게 달리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누군가 끼니를 넣어줄 때만을 기다리며 다락에서 숨어 지낼 만한 형편이 아닐 바에야 좀 더 영리한 생존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 일부 독일 여성들은 의식적으로 러시아 군인과 동침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시 성폭력이라는 사건의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지금 내가 이토록 비참한 것은 그 짓 자체 때문이 아니다. 내 의지에 반해 내 몸이 능욕당하고 있는데도 살기 위해 묵인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글로써 자신의 곤경을 똑바로 응시하고, 주위의 “비참한 무리들”을 관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의 욕망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민낯을 드러낸다. 러시아 병사들이 여성을 끌어내려고 하자 함께 피신해 있던 독일 남성은 “제발 빨리 따라가요, 당신이 우리 를 위험하게 만들잖아요!”라고 외친다.

한때 나치에 가담했고 공산주의에도 매료됐던 저자는 “지금 우리의 정복자들은 정규군이든 나치 친위대든 그저 ‘독일인’으로 간주할 것이며, 우리 모두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다”라며 비교적 정확한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든 것이 두꺼운 장부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마저 꼼꼼하게 기록하다니, 그야말로 착실한 민족이다. 밤늦게 베토벤의 곡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나는 방송을 꺼버렸다.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

종전 후 “썩은 시체”가 된 베를린에서 그는 삶을 재건하려는 희망을 품지만, 일기는 6월22일자로 끝난다. 돌아온 남자친구 게르트는 일기에 반복해서 나오는 ‘Schdg’의 의미(독일어 ‘겁탈’의 앞글자를 딴 약어)를 묻고는 떠나버린다. ‘베를린 집단 강간’에 대한 기나긴 침묵을 암시하는 듯하다.

저자는 훗날 1911년생 기자 마르타 힐러스로 밝혀졌다. 1954년 미국에서 <A Woman in Berlin>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됐을 때도, 똑같은 책이 2003년에야 독일에서 나왔을 때도, 저자는 ‘익명’으로 남았다. 하지만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내가 증인으로서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는 그의 바람대로, 책은 시대의 한 단면을 증언하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2004년 <베를린의 한 여인>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절판된 책을 같은 번역자가 새롭게 다듬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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